소개받은 곳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주변이었다. 정확한 교회는 청도신읍교회에 가서 추천받을 요량으로 금요일 새벽 집을 나섰다. 저녁이 돼서야 청도신읍교회에 도착했다. 이 교회 유정순 목사님은 대학 때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었다.
“목사님, 저 왔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기다렸던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초지종을 설명 드렸다. 곰곰이 들으시더니 “여기서 쉬고 혹시 토요일에 교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인도해 줄 수 있겠나”하고 물으셨다.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집회는 은혜 가운데 마무리됐다. “목사님, 저 주일예배 후 시골로 가보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런 제안을 하셨다. “손 전도사, 총각이 시골에 혼자 들어가 사역하는 게 생각처럼 쉽질 않네. 이러면 어떨까. 복학 전까지 우리 교회에서 학생들 지도하며 목회를 배우다 서울로 올라가지. 배울 게 많을 거네.” 왠지 싫지 않았다.
뭐든 열심히 했다. 아이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함께 기도하고 상담하며 공부도 봐줬다. 6개월이 순식간에 지났다. 유 목사님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아이들과도 눈물의 작별을 했다.
68년 3월 학교로 돌아왔다. 2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많이 배웠고 덕수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했다. 졸업식을 앞두고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갔다가 청도신읍교회 생각이 나 ‘졸업 신고’를 하러 방문했다. 유 목사님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손 전도사, 자네 이제 결혼해야 되지 않나. 전임 전도사로 나가려면 결혼해야 하는데. 혹시 만나는 처자가 있나. 막내딸이 유학 가겠다는 것을 붙들어야 되겠는데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나?”
운명은 늘 우연을 가장해 찾아온다. 존경하던 유 목사님이 딸을 만나보라 하시니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유인주 사모를 만났다. 그녀는 부모님이 소개한 신랑감을 거절할 수도 없고 유학도 가고 싶어 고민에 빠졌다. 오빠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서 초청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막내딸을 외국에 보내야하는 노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섭섭하셨다. 그래서 좋은 짝이 나타나면 일찍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다 6개월 동안 날 유심히 살피신 것이었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성품도 좋았고 목사와 결혼하는 데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은 1971년 3월 대구 대봉교회에서 했다. 주례는 박맹술 담임목사님이 해 주셨다. 내가 30살, 아내가 23살 때였다. 나이 차는 있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모생활을 평생 보면서 자란 아내는 내 목회를 곁에서 조용히 도운 평생의 동역자다. 지금도 기도로 헌신적으로 조력한다.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하나님의 섭리는 측량할 수가 없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