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4> 교회 다녀갔던 무당, 아들 의식 잃자 “살려내라”

입력 2018-11-13 00:01 수정 2018-11-13 09:00
손인웅 목사(오른쪽 아래에서 두 번째)가 1965년 군복무 하던 경남 밀양 15육군 병원에서 입원한 환자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거제도 다대교회 마당에서 쉬고 있던 어느 주일 오후였다. “큰일 났어요. 무당집 아들이…” 다대교회 교인이 말을 잊지 못하고 다급하게 손짓만 했다.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우리 넷은 서둘러 신발을 신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당이라면 그날 처음 교회에 나온 주민이었다. 무당이 교회엘 나오다니, 다들 믿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무당집 평상에 그 집 아들이 누워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나 됐을까. 의식이 없었다. 무당은 오열했다. “내가 오늘 교회에 나갔다고 장군신이 우리 애를 데려갔다. 교회 나갔다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너희들이 날 전도했으니 우리 애를 살려내라.” 당황스러웠다. 이 집 아이가 이대로 세상을 떠나면 이 마을 전도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살릴 능력도 없었다. 무서웠다. 그러다 하나 둘 아이를 붙잡고 흔들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땀과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범벅이 됐다. 목소리가 다 쉴 정도로 하나님을 불렀다. “주님. 이렇게 이 아이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살려 주세요.” 넷의 절규가 뒤섞였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아이가 꿈틀거렸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놀랐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다대교회 김수영 목사를 만나 당시 일을 물어봤다. 김 목사도 이 마을에서 그 이야기가 유명하다고 했다. 당시 무당집 아들이 깨어난 덕에 다대교회 출석교인이 늘었고 그 무당집은 부산으로 이사 간 뒤에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당시 그 아이가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정말 잠시 숨이 끊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었고 그 가운데 아이의 의식이 돌아왔다. 모든 게 은혜였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신학교 1학년을 우여곡절 속에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경남 밀양에 있던 15육군 병원이었다. 편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상상과 달랐다. 결핵환자 요양원이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과 같았다. 나는 행정병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곧바로 군목이 전출을 갔다. 후임은 오지 않았다. 내가 신학교에 다니다 왔다는 걸 모두 알았다. 그날부터 군종 겸 군목이 됐다. 시키니까 시작한 일이었지만 대충할 수는 없었다.





신앙이 뜨겁던 때였다. 환자교인들이 교회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들을 진심으로 돌봤던 게 부흥의 이유였다. 겁도 없었다. 간호장교들이 수시로 찾아와 예방약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야학도 시작했다. 사범대 출신 아닌가. 대학에 다니다 온 동료들과 아이들을 만났다. 야학을 차린 곳은 동사무소였다. 우리가 열심히 하자 부대에서 차도 내줬다. 그러다 한 학생이 청와대에 감사편지를 보냈다. 군인 아저씨들 덕분에 공부를 하는데 학교를 지어달란 내용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실사단이 내려왔다. 곧바로 당시 부산에 있던 군수사령부에 가서 자재를 수령하라는 연락이 왔다. 덕분에 교실 3동과 교무실을 지었다. 이 내용이 신문에 기사로도 실렸다. ‘군인 선생님’들의 활약에 대한 내용이었다. 야학 졸업생들은 검정고시를 치르고 부산의 정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군 생활을 통해 실천신학 훈련을 철저히 경험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