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에덴교회 나눔과 섬김] “주님의 교회와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 살다가 죽겠다”

입력 2018-11-14 00:05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지난 30년간 펼쳐온 사역의 원동력이 생명을 건 양떼 돌봄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은 경제부국이 됐지만 여전히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애국가 가사처럼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셔야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DB

소 목사는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목양일념, 일사각오로 지난 30년을 달려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목양일념의 자세가 바뀌지 않도록, 한시라도 이 길을 떠난 타락한 목사가 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주님의 교회와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 살다가 죽겠다고 서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초창기 지하교회 시절 쥐가 많아 쥐끈끈이를 놓았고 커다란 쥐가 눈앞의 먹이를 탐하다가 끈끈이에 잡히는 모습을 봤다”면서 “그걸 보면서 ‘죄의 유혹 앞에 근신하고 깨어 성결을 지키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도 소명감이 조금이라도 녹슬지 않았는지, 성결과 열정이 오염되지 않았는지 돌이켜보며 밤이 깊도록 성령님의 교훈 앞에 무릎 꿇고 있다”고 말했다.

전북 남원 출신으로 전통적인 유교가정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소 목사는 군산제일고 2학년 때 예수를 영접하고 익산 용화산기도원에서 강력한 성령체험을 하며 소명을 받는다. 신학교에 진학한다고 하자 집안에서 모진 매질과 핍박이 있었고 결국 쫓겨났다. 교회에서 노숙을 하던 그는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에 수석 합격한다.

소 목사는 주말이면 신학교 채플실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설교연습을 할 수 없어 무등산제일기도원으로 향했다. 수많은 잡목들이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마이크 대신 막대기를 잡고 설교연습을 했다. 1980년 기도원에서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하다가 평생 믿음의 동역자인 정금성 권사를 만난다. 정 권사는 훗날 소 목사의 장모가 된다.

소 목사는 신학교 2학년이던 81년 정 권사와 전남 화순 백암리에 교회를 개척한 후 2년 만에 교회를 건축했다. 85년 서울 총회개혁신학원에 진학하면서 상경한 그는 86년 12월 배정숙 사모와 결혼했다. 88년 7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8만원짜리 서울 가락동 지하실을 얻어 개척예배를 드렸다. 목사안수를 받기 전 강도사 신분으로 개척한 교회의 첫 예배에는 8명이 모였다.

그는 낮에는 300가구 이상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밤에는 강단에서 새우잠을 자며 목회에 주력했다. 교회 주보를 신문에 끼워 넣기 위해 새벽 신문배달까지 할 정도였다. 소 목사는 ‘전도를 해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와도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헛수고’라는 생각 아래 설교준비에도 매진했다.

그는 “토요일에는 외출을 절대로 하지 않고 서재에 틀어박혀 설교준비를 했다”면서 “하루 종일 설교준비를 하고 밤이 되면 초긴장의 심정으로 강단에 올라가 주일 예배를 상상하며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소 목사는 “예배당에 와서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여할 성도들을 생각하며 의자를 하나하나 만지면서 중보했다”며 “역동적인 예배로 생동감이 가득한 성도, 은혜 충만한 성도를 상상만 해도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도 주일예배에 대한 긴장감으로 토요일 밤마다 불면증과 싸우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한 사람이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도록 속옷과 겉옷을 적셔가며 안간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다”면서 “그것은 내게 맡겨주신 내 양떼들을 위한 몸부림이자 성도들의 영혼을 위한 절규였다”고 회고했다.

소 목사는 88년 11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개척 1년 만에 성도가 100명으로 불어났고 92년 예배당을 396㎡(120평)으로 확장하자 300명으로 성도가 불어났다. 정자동, 구미동 시대를 열고 왕성하게 전도한 결과, 출석성도가 700명을 돌파해 4000명까지 부흥했다. 지금은 재적 성도가 4만5000명이 넘는다.

소 목사에게 목회비결을 물어봤다. 그는 “목회의 비결은 따로 없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목회 자체요, 목회의 비결”이라면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이렇게 힘들게 목회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목회의 땀방울들은 적어도 나의 성도들을 위한 내 생명의 진액이었기에 보람이 컸다”면서 “누군가 내게 목회 비결을 묻는다면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회론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입니다. 언제나 영감이 살아 움직이는 설교, 뜨거운 찬양과 기도응답, 말씀과 성령의 조화, 치유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시온대로의 축복이 활짝 열려있는 교회, 민족과 세계를 향한 선교 열망이 꿈틀대는 산 비전의 교회가 돼야 합니다.”

소 목사는 감격적인 예배,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예배의 앞부분은 참회와 통회자복의 패턴으로 거룩과 경건의 분위기를 유도하고 찬양대 순서부터 서서히 축제의 분위기로 집례해 설교와 찬송, 축도에 이르기까지 축제의 패턴으로 예배를 이끌어 간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동적 예배는 감격과 자유, 기쁨, 원초적 생명이 흐른다”면서 “그 생명의 분위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통회로 파고든다. 이 역동적 예배를 통해 회중에게는 생명의 흐름이 느껴지고 하나님께는 향기롭게 상달된다”고 귀띔했다.

“이 예배가 내적으로 진한 생명이 넘쳐흐르는 임재라면 외적으로는 생동감이 넘치는 일종의 드라마처럼 연출됐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먼저 연출자가 돼 예배를 기획하고 창의성 있게 이끌어가기 위해 혼을 쏟아 부었습니다.”

소 목사는 습관과 타성이 목회자의 최대 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평생의 기도제목은 ‘주여, 언제나 설레고 두근거리는 주일 전날 밤이 되게 하소서’였다”면서 “습관과 타성에 젖은 주일이 되는 날, 그날이 내 목회의 장례일이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빽빽한 목회 일정 때문에 잠시 몸에 이상이 오기도 했다. 안면마비를 겪고 2차례 성대수술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시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고 희생할수록 하나님께서 새에덴교회 성도들에게 축복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에덴교회를 축복하시고 우리 성도들을 통해 세계 민족 위에 뛰어난 영광의 가문을 이루시리라는 확신이 제 가슴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몸부림치고 최선을 다합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