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발생한 서울 종로 국일고시원 화재로 빈곤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당 고시원은 빼곡히 붙어 있는 방, 좁은 탈출구, 스프링클러 같은 안전시설 미비 등 화재에 취약한 요소를 고루 갖췄지만 정부의 제재나 지원에선 벗어나 있었다. 사상자 대부분은 생계형 일용직 노동자들로,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피할 만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망자 7명 중 4명은 월세가 가장 저렴한 ‘창문 없는 방’ 거주자였다. ‘가난해서 또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머물고 있는 거처의 안전 관리가 부실하거나 아예 살 곳을 잃어버린 빈곤층이 사고나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1월 종로구 서울장여관에서 발생한 방화 사상자도 대부분이 장기 투숙 중인 일용직 노동자였다. 화재에 취약한 낡은 건물이었고 스프링클러가 없었다는 점이 이번 고시원 화재와 닮았다.
최고기온 40도를 웃돈 올 여름 폭염으로 사망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쪽방촌 등에 거주하는 빈곤층 독거노인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37만 가구가 쪽방·여관·고시원 등 ‘비주택 거처’에 살고 있으며, 고시원에 거주하는 계층은 15만 가구나 됐다.
경남 거제에서 지난달 머리와 얼굴 등을 수십 차례 맞아 사망한 ‘묻지마 폭행’ 희생자 윤모(58)씨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날품팔이를 하며 오랜 기간 노숙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주거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안전 대책이 취약해 희생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11일 “서울시는 매년 약 600명의 노숙인에게 고시원 등 임시거처를 지원한다”면서도 “하지만 저렴한 주거공간의 안전 관리는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중앙정부도 책임 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9년 7월 건축법 시행령에 근거 규정이 마련되면서 고시원의 복도 폭을 1.5m 이상으로 하도록 정하고 스프링클러 등 소방안전시설 설치는 의무화됐다. 그러나 법 개정 이전에 지어진 고시원에 대해선 개정 법률이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2007년부터 운영한 국일고시원이 스프링클러를 갖추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화재 후 종로구청의 추천을 받아 생존자들이 이주한 일부 고시원 역시 스프링클러 미비 등 여전히 안전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연대, 빈곤사회연대 등 시민단체는 이번 화재가 ‘사고가 아닌 구멍 뚫린 주거복지와 안전망이 부른 참사’라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주거 빈곤층의 거주시설에 대한 화재 안전점검과 함께 공공임대주택을 포함한 사회 안전망 마련을 촉구했다.
박동수 서울세입자협회 대표는 “감옥의 독방보다 작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들은 폭염과 혹한에 그대로 노출되거나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자다가 불이 나도 피하지 못한다”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분노했다.
빈곤층의 거주 지속성을 보장하는 다양한 공공임대주택과 비영리 사회주택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윤지민 종로 주거복지센터 팀장은 “저렴한 주거공간이 법적으로 주택이 아니라도 실질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이므로 정부는 최소한의 안전보장 및 주거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동시에 이것이 월세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공공재원 투입과 민간의 책임을 명시한 규정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무전재난(無錢災難)’의 슬픈 악순환, 주거 빈곤층 참사
입력 2018-11-12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