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그 사람의 감사 일기장

입력 2018-11-06 00:01

나는 종종 학생들로 하여금 부모님께 감사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답글을 읽어준다. 무응답도 많지만 답글은 대개 두 가지다. 아주 따뜻한 글도 있지만 읽어주기 민망한 글도 많다. ‘미친×’ ‘점심 잘못 먹었냐’ ‘네가 웬일이니’ ‘용돈 떨어졌냐’ 등등…. 평소 감사 표현을 해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간에 다시 메시지를 보내면 완전히 다른 답글이 온다.

난 또 학생들에게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수업 때 동료들과 나누게 한다. 20년 전부터 그리해왔는데 처음에는 어색해하지만 점점 좋아한다. 언젠가 1시간 동안 감사일기를 쓰게 했는데 10가지도 못 쓰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단 한 가지도 쓰지 못하는 학생이 있어 그를 따로 불러 면담한 일도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의 평생소원 100개씩은 갖고 산다고 한다. 우리 삶에는 하루에도 수백 가지의 고마운 일들이 쏟아지지만 그걸 고마운 일로 보는 사람에게만 고마운 일이 된다. 지금 당장 나를, 다른 사람을, 처한 상황을, 하고 있는 일을 잘 관찰해보자. 거기에 고마운 일이 없는지. 만약 10분 내에 고마운 일 10가지를 찾아서 쓰지 못한다면 ‘감사 맹’이라 할 수 있다.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높은 산을 오르다 엔진 하나가 고장이 났다. 다른 엔진을 가동시켰지만 그마저 중턱에서 꺼지고 말았다. 기관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승객 여러분,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소식입니다.” 승객들은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나쁜 소식은 우리 열차를 끄는 기관차의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는 것입니다.” 승객들은 탄식하며 걱정을 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게 기차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비행기였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무사합니다. 속히 복구하겠습니다.” 승객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염려 욕심 후회 비교 망각 불만 같은 것들이 ‘감사맹’을 만든다. 특히 짜증을 내는 사람은 함께 있는 사람에게도 고혈압, 스트레스, 불안, 두통, 혈액순환 악화 등을 전염시킨다고 한다. 오래 살고 싶으면 불평불만을 많이 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다.

그리스의 법학자 라이피 콥스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벌주는 법을 따로 만들지 않은 까닭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가장 큰 형벌이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 듀크대학병원 의사들은, 매일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산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이자 방부제라 할 수 있다.

요즘 감사일기 쓰기가 학교 기업 군대 등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끼리의 매너, 긍정심리요법 수준임에도 이처럼 활발한데 교회의 감사운동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왜 그럴까.

첫째, 감사의 뿌리를 놓쳐서다. 감사의 뿌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음이 돼야 한다. 둘째, 개인의 내적 운동에 그쳐서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음의 감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착한 행실’(마 5:6)을 보여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베풀고 섬겨야 한다. 남에게 받은 것이나 노트에 적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감사일기에 등장하는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벌이는 ‘자발적 불편운동’이 좋은 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잘못을 관용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2)라는 주기도문을 외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는커녕 싸움만 하고 있으니….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감사! 개인적으로 이번 감사절을 지내면서 ‘용서받음-감사하기-베풀기-용서하기-용서받음’이라는 감사 사이클을 깨닫게 돼 고마움이 마음에 가득하다. 우선 내 감사일기장은 덮고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의 감사일기장’에 등장할 것인지 고민해보려 한다.

이의용 (국민대 교수·생활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