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는 이것 말고도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경북대 총장은 고병관 박사였다. 신앙이 좋았던 장로이셨다. 기독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분으로 기억한다. 이분이 1950년대 초반 해외에서 열렸던 ‘국제기독학생회캠프’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 고 총장은 캠프에 참석한 전 세계 학생들에게 경북대를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1955년 경북대에서 제4회 국제기독학생회 캠프가 열렸다. 당시로선 유치한다는 생각 자체가 힘들었던 국제적 행사였다. 이를 계기로 기독학생회와 지역교계가 의기투합했다. 그 결과로 세워진 시설이 바로 ‘기독학생회관’이다. 기독학생회관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1977년 건물을 새로 지었고 2000년엔 약학대학 옆에 또 다시 건물을 지으면서 이름을 ‘경북대기독센터’로 바꿨다. 2005년에는 경북대학교회도 설립됐다. 당시나 지금이나 국립대에 기독교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마련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기독학생회관에 입소했다. 입소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당연히 세례교인이어야 했다. 선배와 교수들이 면접관으로 참여한 가운데 까다로운 면접고사를 치렀다. 학점도 높아야 했다. 입소한 뒤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했고 새벽기도회에 세 차례 결석하면 방을 빼야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학술 발표회도 열렸다. 순서에 따라 발표도 하고 토론에도 적극 참여해야 했다.
입소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생활비를 걷었고 매달 ‘생활총무’를 선출해 직접 살림을 살아보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수도원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학술발표회가 매일 반복되던 삶이었다. 주말엔 각자 교회로 흩어져 봉사도 했고 때때로 고아원을 위로방문하거나 야학에서 교사도 했다. 한 방에 두 명씩 모두 24명의 기독학생이 생활했다. 두 가지가 유익했다. 우선 같은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함께하면서 신앙이 깊어졌다. 의대 사범대 법대 등 모든 학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학술발표회를 통해 박학다식해졌다. 학업과 신앙생활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으니 무척 유익한 공동체였다.
공동체와 자립을 경험하면서 어울려 사는 법도 터득했다. 그야말로 ‘연합운동의 실제’를 살면서 배운 것이었다. 현재의 건물을 지을 때는 대구 지역 교계가 모두 자기 일처럼 나섰다. 한 교회는 개척교회에 지원할 자금 6억원을 경북대에 쾌척했다. 이런 정성이 모여 지금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물론 특정 종교만을 위한 시설이어서 총장이 바뀔 때마다 문제가 됐다. 하지만 기독 교수들과 동문들이 번번이 지켜냈다. 지켜낸 것뿐만 아니라 키워갔다. 센터 출신 동문 중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옥수수 박사로 잘 알려진 김순권 박사, 김성수 전 고신대 총장 등이 기억난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