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린 남편과 부부상담 하라니, 폭력 방관하는 이혼 법정

입력 2018-11-02 04:00

남편의 살해 위협에 이혼을 결심한 김미옥(60·가명)씨는 헤어지는 과정에서 또 한 차례 억장이 무너졌다. 사실 관계 파악을 위해 찾아온 법원의 가사조사관에게 “남편이 칼을 들고 위협을 했다”고 폭력사실을 털어놨는데 조사관은 “남편이 크게 뉘우치고 있는데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김씨는 “‘그래도 죽지 않았잖아요’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여러 가정폭력 피해자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하는 과정에서 김씨처럼 상처를 입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혼보다 가정 회복을 중시하는 법원의 기조 탓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혼 절차를 위해 폭력 남편과 다시 만나는 일이 두려워 ‘별거’를 지속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재인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쉼터 시설장은 1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법원의 이혼 절차에는 가정폭력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며 “가해자를 만나는 게 두렵고 불안하지만 면담을 해야 이혼을 할 수 있어 법원에서 신변보호 신청까지 받고 (이혼 절차를) 시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협의이혼은 신청 전 상담위원과 부부의 면담이 의무적이다. 부부가 따로 면담을 하더라도 이혼신청서를 제출할 때와 확인기일에 법원에 출석할 때 등 최소 2차례는 서로 얼굴을 봐야 한다. 재판을 통해 이혼할 경우 판사가 부부 상담을 권고할 수 있다. 의무는 아니지만 결정권을 쥔 판사 권고를 거부하기가 어렵다.

이 같은 절차 탓에 남편에게서의 도피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30여년간 남편의 잦은 폭력에 시달린 조미선(50대·가명)씨는 부부 면담을 원치 않아 이혼을 포기했다. 그는 남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조차 싫었다. 2년째 남편을 피해 거주지를 옮겨 다니고 있다.

이혼 절차에서 진행되는 부부 상담, 자녀면접교섭권이 피해자에게 부담이 되자 정부는 2013년 경찰청·법원에 이를 제한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가정폭력 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 시설장은 “법원은 아직까지 가정보호, 가정회복 유지를 중시하는 관점으로 사건을 보기 때문에 정부 대책은 구속력이 없다”며 “실제 이혼소송에서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혼소송 전문인 최동훈 변호사는 “재결합 의지가 전혀 없는데 상담을 권해 피해자 입장에서 난감한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가정폭력사건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 대처가 이혼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3년간 검거한 가정폭력 피의자 중 35.2%는 형사사건이 아닌 가정보호사건으로 법원에 송치됐다.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을 경우 여성은 이혼 절차를 더 손쉽게 진행할 수 있지만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되면 가해자는 상담이나 사회봉사 등 ‘처분’만 받는다.

한국젠더법학회장인 신옥주 전북대 로스쿨 교수는 “현재 법은 처벌이 아닌 처분으로 성인을 교정하고 가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검찰은 형사사건으로 기소하고 법원이 처벌과 처분을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달 22일 서울 강서구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모(49)씨는 이날 검찰에 송치됐다. 김씨는 전처 차량에 GPS 위치추적기를 몰래 부착해 거주지를 찾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검찰로 이동하면서 “아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