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 ‘특수’를 감안해야 한다.” 수출입은행은 최근 연구보고서에서 조선업 동향을 짐짓 차갑게 평가했다. 한국의 선박 수주량은 올 들어 9월까지 950만 CGT(선박의 단순한 무게에 부가가치, 작업 난이도 등을 반영한 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이미 지난해 기록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현대상선이 국내 조선업체들에 발주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을 제외하면 9월 수주량은 외려 부진했다는 지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했던 ‘조선 강국으로의 재도약’은 영영 어려운 일일까. 한때 ‘수출 효자종목’이었던 조선업을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에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뒤섞여 있다. 2016년 하반기부터 회복된 수주 물량들은 비어 있던 조선소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년 전의 호황을 다시 꿈꾸면 곤란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죽다 살아나긴 했는데, 장밋빛으로만 전망하기엔 불편한 대목이 많다는 얘기다.
바닥은 쳤다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의 양종서 박사는 냉정한 평가에 대해 31일 “수치만 믿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였다”며 “분명 개선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 박사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의 선박 발주량은 지난해보다 13%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한국의 수주량 증가율은 이를 훌쩍 뛰어넘는 70% 수준이다. 신조선가(배 판매 가격)가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신음하던 한국 조선업계에 도움을 준 요인 중 하나는 조선·해운업 역사상 유례가 없던 환경규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0년부터 선박들의 황산화물 등 해상오염물질 배출량을 강하게 옭아매겠다고 공언해 왔다. 선사들은 선령(船齡)이 높은 배를 폐선하고 오염물질 정화장치가 있는 새로운 배를 만들어야 했다. 양 박사는 “제대로 된 배를 지을 수 있는 건 한국뿐”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의 한파를 거치면서도 한국 조선업계는 부가가치가 높은 가스선 시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 최진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결국 실력의 우위가 여기까지 버티게 한 원동력”이라고 진단했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인 중국 조선업계는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도 적자에 허덕인다. 일본은 1980년대 말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연구·개발(R&D) 인력을 퇴출시켜 스스로 기반을 허물었다.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한 불안요소
‘하이엔드(최첨단제품)’ 시장에서의 강점이 곧장 ‘메인스트림(주류)’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고부가가치의 가스선 발주를 독식한다고 해도 예전만큼의 업황 회복까지는 갈 길이 멀다. 최 연구원은 “액화천연가스(LNG)선을 제외한 선박들에서는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양 박사도 “LNG선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이 독보적인 건 사실이지만, 시장 자체가 ‘마이너’하다”고 했다.
31일 공시되기 시작한 조선업계의 3분기 실적을 봐도 침체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말할 수준이 못된다. 현대중공업은 흑자 전환했지만 조선 부문만 떼어 보면 3000억원대 손실이다. 삼성중공업도 적자폭이 확대됐다.
지역 경제를 지탱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조선업은 수주부터 건조까지 대개 2∼3년이 소요된다. 수주량보다 수주잔량이나 건조량이 중요하다는 말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2016년 ‘수주절벽’의 영향을 아는 금융 당국과 은행권은 선박기자재업체를 위한 저리 자금을 배정하고 있다.
아직은 모두가 고통을 더 감내해야 한다. 창원상공회의소는 지난 6월 기획재정부와 금융 당국에 건의문을 보내고 중형 조선업체들에 대한 선수금환급보증(RG) 발급을 촉구했다. 기업회생 절차를 거친 STX조선해양이 올해 상반기에 그리스로부터 선박 7척을 수주했는데, 산업은행의 RG를 받지 못해 취소된 점을 한탄한 것이었다. 정부의 회신도 안타까웠다. “자산매각 등 자구계획 이행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많은 이들은 “과거의 호황을 그리워하면 안 된다”고 한다. 수출입은행이 추산하는 한국 조선업의 적정 수주량은 연 1000만∼1100만 CGT 수준이다. 주문이 밀리던 10여년 전의 영광에 비하면 불만스러운 수치지만, ‘롱런’을 위해서는 그 정도가 적정하다고 양 박사는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바닥 친 조선업… “옛 영광 꿈꾸기보다 롱런 준비하라”
입력 2018-11-01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