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남북이 체결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대해선 두 개의 엇갈리는 사실이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과 전쟁위험 제거에 합의한 실질적 불가침 선언’이 팩트라고 말하지만(팩트 브리핑 5호), 자유한국당은 ‘수도권 안전을 사실상 포기한 선언이며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한 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이것이 진실이다’ 시리즈).
국가 주요 현안에 여야가 각각 “우리 말이 사실이다”고 다투는 ‘팩트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보다는 주장에 가까운 부분이 많다. 여야 모두 부분적 사실만을 발췌한 뒤 ‘팩트’라고 포장해 결국 각자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요즘 민주당은 원내종합상황실에서 ‘가짜? vs 진짜! 팩트 브리핑’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1호를 시작으로 29일까지 18호를 발행했다. 국정감사 기간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의 사실 여부를 점검해보자는 취지다. 한국당도 ‘카드뉴스’와 ‘이것이 진실이다’ 시리즈를 내고 사실관계를 따지고 있다.
하지만 여당의 팩트 브리핑을 뜯어보면 사실과 주장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팩트 브리핑 6호는 한국당 심재철 의원을 둘러싼 비인가 정보 유출 논란에 대해 “합법이 아니라 국가재정 시스템을 해킹한 국가기밀 불법탈취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심 의원이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심 의원의 현행법 위반 여부는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자칫 일종의 ‘수사 가이드라인’ 논란으로도 번질 수 있는 사안이다.
외부 전문가들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내용을 무조건 “팩트가 아니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잦다. 여당 팩트 브리핑 18호는 “특별재판부가 위헌·인민재판이라는 주장은 사법농단 세력 보호본능”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특별재판부 설치가 ‘입법부 만능주의’라는 지적이 법원 주변과 학계에서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팩트 브리핑 9호도 “(여권의) 가짜뉴스 대책은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진보적인 법학자와 여권에 우호적이던 시민단체들조차 “과도한 대책”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당이 제작하는 카드뉴스도 비슷하다. 지난 22일 발행된 카드뉴스는 “서울교통공사가 민주노총 노조의 가족회사로 전락한 이유는 민주노총 뒤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있기 때문”이라며 논란의 배후에 박 시장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감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쟁점 대신 엉뚱한 내용을 팩트 체크하면서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팩트 브리핑 1호는 문재인정부 인사가 야당 주장대로 호남 편중 인사인지를 다뤘다. 하지만 문 정부 인사 구성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박근혜정부를 비롯한 역대 정부 인사가 ‘서울 편중, 호남 배제’ 인사였다는 점을 부각했다.
정치권의 이런 모습에 대해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미디어나 SNS 등 팩트 체크를 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졌기 때문에 여야가 일방적 주장을 ‘팩트’라고 호도하면 결국 신뢰만 더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각 당의 팩트 주장 과정에서 사실과 주관이 혼재되면서 참·거짓의 구분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권의 과다한 ‘셀프 검증’과 ‘팩트’ 주장으로 정치적 불신만 더 커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
못 믿을 여야의 ‘팩트 체크’, 입맛대로 발췌한 뒤 ‘사실’ 주장
입력 2018-10-30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