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남편 난동 신고하자… 경찰 “잘 살아보라”

입력 2018-10-30 04:05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가정폭력 대응을 규탄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가정폭력 사범에 대한 강력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A씨는 15년간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경찰의 도움은 받지 못했다. 그는 “전 남편이 이혼 후에도 ‘찢어죽이겠다’며 문을 부숴 경찰에 신고했더니 ‘왜 이런 일로 경찰까지 부르냐. 잘 살아보라’는 말을 들었다”며 “수사과정에서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수년간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B씨는 “경찰을 불렀지만 ‘그래도 아빠인데 신고하면 어쩌냐’ ‘아빠 집에 같이 있기 싫다는 게 말이 되냐’고 나무라기만 했다”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시민단체는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피해 사례를 고발했다. 이들은 국가의 대응체계 부실 속에서 ‘서울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등 가정폭력에 의한 살해가 끊이지 않는다고 규탄하며 전면적인 시스템 쇄신을 촉구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지난 9년간 최소 824명의 여성이 연인이나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됐고 602명이 살해될 위험에 처했다”며 “응급조치와 (긴급) 임시조치 등 피해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가 있지만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친구라고 밝힌 C씨도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작 가정폭력에 대한 강력 처벌 탄원서를 넣을 걸 후회스럽다”며 “이혼 후 협박에 시달리던 친구는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친구가 한을 풀 수 있도록 가해자에게 사형이 선고되게 도와 달라”고 울먹였다.

김명진 ‘여성인권 실현을 위한 전국 가정폭력상담소연대’ 준비위원회 위원은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이들 중 99%가 풀려났고 구속률은 1%가 채 안 된다”며 “형사기소가 돼도 검찰에서 상담 받으면 기소하지 않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가 있다”고 제도의 부실함을 지적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2013년 경찰청 자료를 보면 경찰 내부에서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 안에서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인식 비율이 57.9%”라며 “가정폭력 피해자가 최초로 만나는 공권력인 경찰이 외면하는 사이 피해 여성은 죽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