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두 명의 탕자

입력 2018-10-31 00:03

최근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서 직접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며 몇 가지 궁금했던 성경 내용들이 이해되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게 된 첫걸음은 굶주려 죽게 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 돌아오는 길이 멀었어도 대문을 박차고 아버지의 집을 나가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아버지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맏아들은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집안의 탕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불만이나 불평이 아니라 ‘당연히 여김’입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맏아들이 영원한 탕자임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에 부담스럽도록 크게 그려 놓았을 것입니다.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반기기는커녕 노려봅니다. 아버지의 전 재산은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재산을 뜯어갈 동생이 돌아왔으니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맏아들의 모습을 보며 ‘왜 아버지는 본문 12절에서 유산을 요구하지 않았던 맏아들에게도 재산을 나눠줬던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탕자처럼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동생 이상으로 아버지의 돈에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재산을 각각 나눠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맏아들은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유대인들은 창자를 동정이나 긍휼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근원지로 보았습니다. 집 나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로 두 눈이 짓물러 초점조차 없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눈먼 하나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은 돼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돼지치기를 하다가 돌아온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돌아온 아들의 냄새로 인해 죄의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픈 긍휼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려고 탕자의 어깨를 힘 있게 붙잡는 오른손을 아버지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탕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왼손은 어머니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무엇보다 죄수처럼 삭발한 머리의 탕자 모습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동네 사람들이 탕자를 굶겨 죽이려 했을까요. 아무리 가뭄 들어 먹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사료를 사람이 먹겠다는데 그것을 빼앗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탕자가 돈이 있을 때 얼마나 인간이 할 수 없는 짓을 드러내놓고 했는지 알기에 그를 굶겨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죄인이 아버지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은 마치 신생아의 모습같이 보입니다. 곧 새롭게 거듭난 아들의 모습을 표현해 낸 것입니다. 탕자는 지독한 굶주림에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상징해주는 단검을 팔아먹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을 ‘아저씨’가 아닌 ‘아버지’로 부르고 달려와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맏아들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말씀이 자신을 억압하는 명령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갖고 살게 하는 것이 결국 돈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이 돌아오길 간절히 원하시기에 전도하고 그 아버지의 심정을 알아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임헌만 서울 행복드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