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여섯 차례나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25년간의 악몽은 죽어서야 끝이 났다.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25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린 끝에 전 남편 김모(49)씨에게 살해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질적인 가정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만 살해되거나 살해 위협을 받은 여성이 200명 가까이 됐다. 전문가들은 경찰 초동 대처부터 법원 판결까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부실한 것이 문제라고 본다.
25일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85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03명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에서 수사기관의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딸은 “(이혼 전) 엄마의 얼굴이 피투성이 된 날에도 경찰은 아빠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간단 조사만 받고 집으로 왔다”고 했다. 관련법상 경찰이 현장에서 가정폭력 가해자를 강제로 격리시킬 권한은 없다. 정세종 조선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가해자를 방에서 퇴거시키는 ‘긴급임시조치’가 있지만 검찰을 거쳐 법원의 확인을 받아야 해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 상황에서 경찰은 훈방조치로 끝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해자 검거 이후 절차도 문제다. 현재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정 보호 및 유지’를 입법 목적으로 해 수사기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검찰은 피해자의 의사, 가정 형편 등을 고려해 형사 처벌 대신 가정보호처분을 내릴 수 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일반 폭력 사건이었다면 형사 처벌을 받을 만한 건도 가정 내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접근금지 명령, 관련 교육 수강 등 처분이 내려진다”고 말했다. 가정폭력 사범 기소율은 2014년 13.3%에서 2016년 8.5%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과거 피의자 김씨도 가정폭력으로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피해자를 계속 위협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 현장을 가장 먼저 접촉하는 경찰에 대처 권한을 더 부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경찰이 검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법원에 임시조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또 고 대표는 “관련법의 입법 목적 등을 개정해 가정폭력 사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도 제8차 국가보고서 심의에서 “한국의 가정폭력처벌법 목적을 ‘피해자와 가족의 안전보장’으로 개정하고 가해자에 대한 형사 처벌을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가정폭력을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것)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향순 전국가정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는 “남편의 보복이 두려운 여성에게 ‘남편을 처벌 할래 안 할래’라고 묻는 건 이중 고통을 준다. 이번 사건 역시 피해자가 여러 번 ‘남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다만 “가정폭력의 경우 형사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가정보호처분의 실효성을 높여 폭력 재발을 막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 남부지법은 이날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김씨가 피해자의 차량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부착해 피해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범행일에는 자신을 못 알아보게 하기 위해 가발을 쓰고 접근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죽어서야 끝난 ‘25년간의 악몽’
입력 2018-10-26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