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오빠를 시작으로 언니와 올케언니 그리고 내년에는 시숙, 그다음에는 나와 남편이 차례로 회갑이다. 100세 시대에 회갑은 그저 조금 특별한 생일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은 나이인 것은 분명하다. 누구는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꽃은 이미 떨어졌고 잎이 지는 일만 남았다고도 한다.
언제 한 번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까마득한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내 세상인 양 “야호!” 하고 외쳐 본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한 번 활짝 꽃 피웠던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젠 그만 내려가야 한다고, 이미 꽃은 떨어졌다고 하니 참 어이없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무언가 잘못 살아온 것 같기도 하고, 되돌아간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스무 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유는 단순해서, 그 불확실함과 불안정의 시기를 잘 살아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확실하고 안정감 있게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족하고 아쉬운 대로 지금의 이 나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 나는 그래서 ‘다시 이십 대가 된다면, 젊은 시절로 돌아가 봤으면…’ 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이 드는 데도 분명 좋은 점이 있긴 한 것 같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그렇고 그런 자기 위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 4:4, 새 번역)
나이 듦이 내게 준 다섯 가지 선물이 있다. 첫째는 나의 분수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아, 나이 들어 참 좋구나!’ 하고 처음 느낀 것은 내가 스스로 내 분수를 알아차렸을 때였다. 제 잘난 맛에 취해 노력과 열정으로 세상 모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그때의 나는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조금씩 나이 들면서 내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알고 한계를 스스로 인정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귀히 여기게 되었다.
둘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분수를 알고 나니 매일 매 순간 헉헉대며 달려가도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며, 모든 소원과 바람이 동일하게 채워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부터 채워가면서 불가능한 욕구를 때로는 포기하고 때로는 버리기도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도를 보며 험하고 낯선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셋째는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을 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 듦은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과 미련보다는, 다른 사람이 걸어간 또 다른 길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줌으로써 세상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나의 삶은 세상의 다양한 삶의 방식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수없이 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결코 성숙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넷째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을 주어야 사랑을 얻을 수 있고 열심히 일해야 보상을 얻는다. 움켜쥐고 있는 삶은 외롭다. 인색함은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바싹 마르게 하는 독인데, 인색함은 돈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심하게 마음 한 번 쓰지 않고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위안을 얻으려다 보니 사람들 사이는 늘 삐걱거린다.
다섯째는 새로운 인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남아 있는 인생을 생각해보면, 앞으로의 삶 역시 결코 만만찮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리막이 분명하다고 해서 인생의 남은 반을 상실과 소멸로만 여겨야 할까. 수확물이 많든 적든 생의 열매들을 거둬서 뭉근하게 익히기에는 젊음의 때보다는 지금이 가장 알맞지 않을까. 그래서 나이 듦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새롭게 디자인할 것을 권유한다. 겉보다는 내면으로 들어가든, 결과물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으로 삶을 전환하든, 그 모두가 나이 듦의 선물이다.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100세 시대 ‘나이 수업’] 나이 듦이 내게 준 다섯 가지 선물
입력 2018-10-19 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