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 유치원 54개 늘렸는데, 늘어난 원아는 32명인 비밀, 사립유치원의 로비력
입력 2018-10-15 04:04
성인용품부터 명품 가방, 외제차 수리비, 원장 자녀 등록금까지…. 유치원생 교육에 쓰라고 국가가 지원한 돈을 흥청망청 허비한 사립유치원의 행태가 공개되면서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이런 비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국회로 몰려가 조직적으로 위력을 행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립유치원 개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사립유치원이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된 데는 표를 의식한 선출직 공직자들의 ‘뒷짐’과 교육 당국의 ‘눈치 보기’의 합작품이란 지적이 나온다.
사립유치원의 영향력은 교육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수치로도 추정할 수 있다. 2017년에 국·공립유치원은 4747개, 학급수 1만395개였다. 원아 17만2521명을 수용했다. 올해 국·공립유치원은 4801개로 늘었다. 학급수는 1만896개로 증가했다. 그런데 원아는 17만2553명으로 겨우 32명 늘었다. 정부가 예산을 들여 건물을 짓고 교사를 뽑아 국·공립유치원을 늘려도 학부모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거의 없는 것이다.
교육 당국의 사립유치원 눈치 보기의 결과란 지적이 많다. 학부모들은 국·공립유치원을 선호한다. 그래서 사립유치원들은 주변에 국·공립유치원이 들어서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교육부 관계자는 14일 “사립이 이미 자리 잡은 곳은 (국·공립유치원을 늘리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정작 국·공립유치원 수요가 많지만 사립유치원 저항이 심한 대도시 지역은 놔두고 유아 교육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농어촌 지역에 국·공립을 늘린 결과란 설명이다.
교육부에서 과거 유아교육을 담당했던 관료들은 ‘버겁다’라고 입을 모았다. 사립유치원이 싫어하는 정책을 시도하면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기도 하고 교육부 앞 집회도 각오해야 한다고 전했다. 비리사립유치원 명단을 공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사립유치원 비리 관련해서) 여야 막론하고 동료 의원들이 우려를 많이 전달했다”고 말했는데 과장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유아교육 정책에 정통한 한 교육계 관계자는 “사립유치원들은 각 시·도 의회에도 영향력이 막강하다. 시·도에서 만드는 조례를 통해서 규제하는 부분도 중요한데 (사립유치원 책무성 강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에선 호기로 보고 있다. 박 의원이 나서서 ‘벌집’을 건드려줬고, 이를 계기로 사립유치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을 활용하겠다는 심산으로 읽힌다. 내년까지 선거가 없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린다. 특히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020년 총선 출마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강도 높은 개혁이 속도감 있게 진행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도 고개를 든다.
교육부는 우선 사립유치원이 돈을 허투루 쓰지 못하도록 회계시스템을 정비키로 했다. 사립유치원들은 국가로부터 누리과정 지원금을 받고 있다. 한해 2조원 규모다. 여기에 학부모들로부터 원비를 걷고 있다. 사립유치원 운영자들은 유치원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인 돈과 유치원 돈을 혼용해 사용하다 이번에 철퇴를 맞은 것이다. 국·공립유치원과 사립 초·중·고교는 ‘에듀파인’이란 회계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다. 사립유치원만 에듀파인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이는 ‘원장 1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유치원에는 에듀파인이 부적합하다’는 사립유치원 요구를 수용한 결과란 지적이다.
교육부는 ‘유아교육종합정보시스템 마스터플랜(ISMP)’을 내년 상반기 중으로 완성할 계획이다. 마스터플랜에는 사립유치원 회계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청사진이 담긴다. 에듀파인 적용 여부도 포함돼 논의될 예정이다. 교육부는 마스터플랜이 나오면 조속히 회계시스템 구축을 완성할 방침이다. 회계시스템이 구축되기까지 과도기적인 상황에서의 대책도 만들기로 했다. 또한 앞으로도 비리 유치원의 실명을 공개할지를 시·도교육청과 논의키로 했다. 교육부는 조만간 이런 내용을 담아 사립유치원의 사회적 책무성을 강화하는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지영 교육부 유아교육정책과장은 “사립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도록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회계의 불투명성 등으로) 현재 여건에선 지원했을 경우 온전히 교육의 질 개선으로 가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