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형 회계법인, 전관 ‘빽’ 믿고, 조세 심판관들에 갑질

입력 2018-10-12 04:00

지난 8월 조세심판원 심판정에서 심판관들은 한 대형 회계법인 소속 세무사에게 난데없는 수모를 겪었다. 국세청이 B기업에 부과한 세금 10억여원을 취소해 달라는 사건 심리가 열린 날이었다. 주심 심판관이 국세청과 기업 측 대리인 의견을 청취하고 종결 선언을 하려는 순간 대리인이 끼어들었다. 대형 회계법인 소속 A세무사는 이런 식으로 납세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세무사는 심판관이 질문을 안하는 것은 납세자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고함을 질렀다. 한 심판관이 심판정을 모욕하지 말라고 제지하자 이 세무사는 심판정을 모욕하는 건 심판관들이라며 삿대질을 했다. 조세심판원 관계자는 11일 “난동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전했다.

반전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B기업이 A세무사와 대리인 수임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고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 기업은 조세심판원에서 심리가 열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B기업 관계자는 “A세무사가 속한 회계법인에 강력 항의했고, 회계법인 고위 관계자가 회사에 찾아와 대표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국내 굴지의 회계법인에서 벌이는 ‘묻지 마’ 영업 행태에 모두 놀랐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세정 당국 관계자는 “대형 회계법인 소속 전관의 ‘빽’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회계법인은 뒤늦게 심판관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조세불복 절차 중 하나인 조세심판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조세심판원에서 세금을 취소하라며 내리는 결정은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 성격을 갖는다. 국세청은 이의제기를 할 기회조차 없이 부과한 세금을 취소해야 한다. 그만큼 대형 회계법인의 성공보수도 크다. 또 다른 세정 당국 관계자는 이를 두고 “대형 회계법인의 숨겨진 노다지”라고 표현했다.

대형 회계법인들은 세정 당국 전관을 앞세운 로비가 작동하기 쉬운 조세심판원만의 ‘특별한 절차’를 활용하기도 한다. 조세심판원은 심판부에서 인용이나 기각 결정을 내린 이후 행정실 내부 검토를 거쳐야만 결정이 최종 확정된다. 조세심판원장을 보좌하는 행정실장은 내부 검토를 통해 심판부의 결정을 따를지, 재심의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이 갖고 있다. 기업이 심판부 심리를 통해 거액의 세금 취소 결정을 받아냈는데 행정실 내부 검토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이때 기업들은 세정 당국 출신 전관을 통해 행정실에서 빨리 세금 취소를 확정해 달라는 로비를 벌이는 것이다. 조세심판원 안팎에서는 이를 ‘통행세’라고 부른다.

한 전직 조세심판원 심판관은 “행정실이 이유 없이 사건을 계속 들고 있으면 기업체나 회계법인 입장에선 몸이 달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행정실과 통할 수 있는 전관이 속한 회계법인이 하나 더 끼어들어오는 식”이라고 말했다. 조세심판원이 한 해 처리하는 사건은 8000건을 넘는다. 1998년 조세심판원이 개원한 이래 행정실 조정검토 현황이 공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