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혁(42) 서울대 교수는 ‘A4용지 작가’라 부를만하다.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착륙’에 가보라. 왜 그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전시장을 빙 둘러 A4용지에 제작한 작품이 2, 3개씩 짝을 지어 리듬을 이루며 진열돼 있다.
규격화된 A4용지 안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미지들이 색면으로 아주 단순하게 표현돼 있다. 이를테면 초록색을 배경으로 붉은색 인간 형상이 원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 그렇다. 누구라도 축구 국가대표팀이 경기 시작 전 승리를 다짐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규격화된 기성품을 쓰는 이유에 대해 “그리기 이전 준비 단계를 최소화함으로써 화면 안에 집중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A4용지는 또한 일기를 쓰듯 매일 작업하는 성실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빨리빨리 소비되는 시대에 자신 역시 빨리 생산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작은 사이즈에 기성품을 사용한다고.
그는 “A4용지에 작업하면 스케치북에 그리듯 긴장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도 이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넓게 색칠을 한 것 같은 그 이미지들이 가까이 가보면 색종이를 정교하게 오려 붙여 제작한 것이라 더 놀라게 된다.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시건주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렇게 붓질하는 회화 작업을 쭉 해오던 작가는 “작업을 지속하면서 습관처럼 세상을 평면으로 해석하는 저를 발견했다”고 했다.
“빨간색 풍선이 날아가는 걸 보면 초록색 바탕에 빨간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 있죠.”
자연스럽게 형태보다는 색과 색의 조합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작품 속에는 색면과 색면이 부딪히며 빚어내는 명랑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색면의 즐거움을 선구적으로 설파한 프랑스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색칠을 하다 보면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색종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색종이가 색을 평면적으로 더 잘 보여주는데, 굳이 평평하게 색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스티커, 포스트잇, 부직포도 과감하게 쓴다. 그는 자신의 미술세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제 작품을 보며 미술은 대단한 게 아니라 일상과 가까이 있는 것이라 느끼면 좋겠네요.”
전시는 11월 10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A4용지 위에 착륙한 세상
입력 2018-10-15 04:00 수정 2018-10-16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