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이명박 전 대통령 등 정계 거물에 잇따라 내려진 법원 선고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직권남용 혐의가 모두 무죄로 선고됐다는 것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러한 법원 판단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법농단 의혹 피의자 대부분의 주요 죄목은 직권남용이다.
이 전 대통령은 1심에서 뇌물수수 혐의 등이 유죄로 인정돼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김재수 전 LA 총영사를 비롯한 공무원들에게 다스 미국 소송 및 처남 김재정씨 명의로 된 차명재산 상속 업무를 지원하도록 한 직권남용 혐의는 무죄를 선고했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된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압박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을 때 성립한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다스 소송과 차명재산 상속 관련 혐의는 대통령 지위를 이용한 불법 행위가 될 수는 있으나 대통령의 직무권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어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리스트’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보수 성향 시민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전국경제인연합에 요청한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실의 일반적 직무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며 두 사람의 직권남용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다.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중소기업진흥공단 불법 채용청탁 혐의에 대한 1심 선고에서 직권남용죄를 비껴갔다. 재판부는 채용 청탁 사실은 인정했지만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중진공에 대한 감독 권한 행사과정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 선고 결과를 종합하면 고위공직자가 지위를 이용해 불법적 행위를 지시했더라도 직무와 관계없는 일이라면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직자가 직무 지시를 가장해 부하 직원에게 사적 업무를 시키는 경우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급심이 직권남용죄 적용 범위를 좁게 해석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명문에 없더라고 법·제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어떤 직무가 해당 공무원의 권한에 속한다고 해석되면 직권남용죄 적용 범위에 포함된다고 보는 게 대법원 판례다. 대기업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내도록 요구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혐의의 경우 법원은 이를 토대로 지난 8월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 대한 검찰 수사 및 향후 공소 유지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양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굵직한 피의자의 주요 혐의는 직권남용이다. 직권남용 혐의를 좁게 해석하는 기조가 이어지면 이들이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법원이 수사를 염두에 두고 직권남용죄를 더 까다롭게 판단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김재봉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7일 “사법농단 의혹의 경우 일단 사법행정권의 발동이라는 외형을 갖고 이뤄져 법리상으로 직권남용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봤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이명박·김기춘·조윤선 직권남용 무죄 ‘사법농단 수사’에 영향?
입력 2018-10-07 19:50 수정 2018-10-07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