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美에 신뢰 요구한 北… 美가 신뢰할 조치도 이행하길

입력 2018-10-01 04:03
비핵화 협상에 대한 북한의 주장이 한층 뚜렷해졌다. 리용호 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런 논리를 폈다. “우리는 지난 4월 경제건설의 기치를 들었다. 이를 위해선 평화적 환경이 필요해 비핵화를 결단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신뢰 없이는 우리 국가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15분 연설 중 ‘신뢰’와 ‘불신’을 18번이나 말했다. 아직은 비핵화를 실행할 만큼 미국을 믿지 못하겠으니 신뢰할 만한 조치를 해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구한 조치는 구체적이었다. 종전선언을 말했고 제제 완화를 언급했다. 태형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은 실질적 비핵화의 전제조건에 평화협정도 포함시켰다. 둘의 말을 종합하면 북한의 ‘신뢰 구축을 통한 비핵화’는 단계적 동시행동을 뜻한다. 동창리 시설을 폐기할 테니 종전선언을 하라, 그러면 영변 핵시설을 없애겠다고 이미 제시한 상태다.

비핵화를 위해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70년 적대관계가 하루아침에 우호관계로 탈바꿈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뢰는 요구해 얻는 것이 아니라 준 만큼 받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미국도 북한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리 외무상이 불신의 원인을 미국의 제재 고수와 종전선언 기피에 돌렸듯이, 미국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약속이 수차례 깨졌던 과거를 떠올리며 신뢰하기를 망설이는 중이다. 신뢰를 쌓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책임을 한쪽에 돌려선 결코 불신의 벽을 허물 수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몇 차례 서신과 지난주 뉴욕에서 열린 북·미 회담 이후 미국이 보인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진짜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북한이 물밑에서 꺼낸 몇 가지 제안을 미국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신뢰 구축을 진정 원한다면 이렇게 말한 것들을 성실히 이행해야 할 것이다.

리 외무상 연설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요구를 자세히 언급하며 여러 번 강조했다. 정치적 수사가 아닌 협상을 위한 발언이란 점에서 긍정적이다. 판을 깰 뜻은 없어 보인다. 폼페이오의 방북과 빈에서의 실무협상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성과를 거두려면 북·미 모두 신뢰를 주고받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