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문호이며 ‘침묵’의 작가로 알려진 엔도 슈사쿠(1923∼1996)의 강연집이다. 1966년부터 1986년에 걸쳐 일본 기노쿠니야홀 등에서 진행한 아홉 차례의 강연을 담았다. 저자가 쓰고 읽은 여덟 편의 소설을 이야기의 큰 줄기로 삼아 신념을 배반하는 인간의 약점과 슬픔을 위로하고, 자신의 인생관 종교관 문학관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특히 대표작 ‘침묵’을 비롯한 ‘사무라이’ ‘스캔들’ 등의 창작 비화와 집필 의도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인생의 후미에(踏み繪)’. 책의 원제이다. ‘후미에’는 일본의 에도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동판에 새겨 나무판에 끼워 넣은 것. 이를 밟으면 용서받지만, 밟지 않으면 곧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고문을 받았다. 후미에를 밟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은 기록으로 역사에 남아 있지만 배교한 사람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엔도 슈사쿠는 나가사키의 역사자료관에서 우연히 후미에를 봤다. 그 후미에에 남아 있는 거무스름한 발자국과 많은 사람에게 밟혀 마멸되고 움푹 파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고 이후 ‘침묵’이란 작품을 쓰게 됐다. 그는 역사가 침묵하고 교회가 침묵하고 일본도 침묵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생명을 주고, 그들의 탄식에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은 노트 4페이지에 불과했다. 그 기록으로 1200매 되는 소설 ‘침묵’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밟았을지 모르니까요.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침묵의 재 안에서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침묵의 재를 긁어모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울러 저는 박해 시대에 그렇게 많은 탄식과 피가 흘렀는데도 왜 신은 침묵했을까 하는 ‘신의 침묵’과도 겹쳐놓았습니다.”(25쪽)
저자는 에도시대 기리시탄(그리스도인)의 후미에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여기는 신조와 동경하는 삶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듯이 살아야 했기에 저마다의 ‘후미에’가 있다고 말한다.
엔도 슈사쿠의 생생한 목소리로 기독교 문학에 대한 정의와 의미를 탐색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저자는 소설가로서 진정한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의 어둡고 지저분한 부분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리스도교 작가가 있다면, 그 또는 그녀는 인간의 아름답고 깨끗한 부분만 쓰는 게 아닙니다. 보통의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더러운 부분, 추한 부분, 눈을 돌리고 싶은 부분을 씁니다. 보통의 소설가와 다른 것은 그 작품 안에서 악이나 죄에 빠진 인간을 고독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돌파하고 지양해서 더욱 절대자로 향하는 지향을, 얽히고설킨 인간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그리스도교 작가의 한 가지 일입니다.”(99쪽)
그는 문학에 특별히 그리스도교 소설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자인 작가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문학 작품을 쓰기 위해, 즉 인간을 응시하고 탐구하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설가라면, 자신의 주인공을 고독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지 않고 구원의 길, 빛의 세계로 이끌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는 구원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신중하게, 상징적으로 한두 줄이라도 써넣게 된다는 것이다.
책은 청중과 소통하려는 엔도 슈사쿠의 모습과 뜨거웠던 반응도 확인할 수 있어 마치 현장에 앉아 저자의 강연을 듣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신과 구원의 문제’ ‘그리스도교의 아시아적 수용’이란 묵직한 주제의 소설을 주로 발표했던 저자는 자신의 꿈과 신념 동경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루’와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 쥘리앵 그린의 ‘모이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등 20세기 유럽 문학에 나타난 기독교의 모습을 저자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내 인생의 ‘후미에’는?
입력 2018-09-2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