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속박하는 삶의 굴레를 응시한다

입력 2018-09-20 18:46

돼지우리에 수십년을 갇혀있다고 상상해보자.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축사에는 파리와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텁텁한 공기 속 바닥에 깔린 축축한 볏짚은 배설물로 악취를 풍긴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돼지들의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날카로운 울음소리,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이다. 연극 ‘돼지우리’의 주인공 파벨은 절규한다. “결국 내 영혼마저 이 돼지우리와 똑같아지는 건가?”

극작가 아돌 푸가드의 2인극 ‘돼지우리’(연출 손진책)가 지난 8일부터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해외 연극과 신작 무용을 선보이는 행사 ‘베스트 앤 퍼스트’의 연극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한 러시아 이등병 파벨과 그런 남편을 숨긴 채 살아가는 아내 프라스코비야다. 집으로 돌아온 파벨은 무려 41년간 스스로를 축사에 가둔다. 총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내는 그의 유일한 말벗이다. 10년, 20년, 30년, 40년…. 시간이 갈수록 그와 돼지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극심한 불안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파벨. 나약하고 겁 많은 그의 소망은 오직 세상으로 나가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는 것뿐이다.

여기서 그를 가둔 게 ‘두려움’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한 탈영병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삶은 불안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취업과 주거, 노후에 대한 걱정 등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생존’의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총살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위협을 마주할 때 두려움과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택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파벨의 탈출 의지를 꺾는다.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축사에 자신을 밀어 넣고, 안이 바깥보다 안전하다고 믿는다. 연극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저 버티는 게 삶의 목적인가. 인간과 돼지는 무엇이 다른가.

인간과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남아공의 양심’ 아돌 푸가드와 ‘따뜻한 인간애’가 묻어나는 작품을 선보여 온 한국 연극계의 거장 손 연출가가 만났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돼지우리’는 처절하면서도 애틋한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담아낸다. 극적인 무대 변화는 극의 긴장감을 더하고, 박완규 고수희 두 배우의 연기는 압도적인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강경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