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스러져 가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입력 2018-09-21 16:19
경기도 군포 열매교회 이종신 목사가 16일 셋째 누나 이복례 권사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하고 있다. 이 목사는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걱정할 게 없다”고 간증했다. 군포=송지수 인턴기자
이종신 목사가 휠체어에 앉아 마이크를 이용해 주일예배 설교를 하고 있다.
그의 육신은 점점 스러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나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복음을 전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맡은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겠다고 환히 미소 지었다.

경기도 군포 산본로 열매교회 이종신(51) 목사는 온몸의 근육이 굳어 결국 전신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이다. 병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희소질환이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내야수로 활약한 루 게릭(1903∼1941) 선수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2130경기 연속 출전기록을 보유한 이 선수는 병의 진단을 받고 2년 만에 사망했다.

“나는 행복한 목회자”

지난 16일 주일예배 후 만난 이 목사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많이 불편해 보였다. 말이 어눌해 잘 알아들을 수 없어 가족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았다. 잠시 숨을 고른 이 목사는 “예수 믿는다고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렸지만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매 순간 뜨겁게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누나의 인도로 교회에 나온 뒤 예수님을 영접했다. 부흥회에서 배운 찬송 ‘불길 같은 주 성령’을 행진가처럼 부르며 늘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중·고등부 시절 학생회장으로 교회학교 학생들을 이끌었고 전도활동에 열심이었다.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 목회자를 꿈꾸게 됐다.

군 제대 후 서울 구로구 한영신학대(현 서울한영대)에 입학했다. 줄곧 1등을 차지했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힘썼다. 세계적인 복음사역자가 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 아랍어 독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혔다. 다니는 교회에선 전도사로 학생과 청년을 담당했다.

1995년 8월 전세금을 빼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전깃불을 아끼기 위해 가로등 밑에서 공부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일상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침례신학대를 졸업한 뒤 서리대 브리스톨대 웨슬리대에서 문학 석사를, 웨일스대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선 협성대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파트타임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국제부장과 나사렛대에서 강사로 일했다. 2009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4개 교회를 개척했다. 2011년 런던 근교 바스감리교회에 부임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목회자”

이 목사 가족은 화목, 그 자체다. 동갑내기 여운순 사모는 간호사로 일하며 그의 목회를 돕고 있다. 첫째 딸 찬미(25)씨는 영국 리딩대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 둘째 딸 누리(23)씨는 영국 런던 로열음악대에 재학 중인 피아니스트다. 두 딸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을 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7월 루게릭병이 찾아왔다. 제대로 거동하기 힘들었다. 가족이나 지인이 돕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였다. 주일예배도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한국에서 침 치료 등을 받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지난해 9월 귀국했다.

“혹자는 한국에 왜 들어왔느냐 질문합니다. 제 대답은 영국에서 체험하고 배운 20년의 지식을 조국 교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싶어서입니다. 영국의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고 지금도 언제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지요. 자녀들도 받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간 한국에 돌아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는 영국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웠다고 한다. 그는 “한국교회도 영국교회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조금이나마 쓰임 받고 싶다”고 전했다.

치료에만 전념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그는 목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섰다. 3남3녀 형제자매들이 교회개척 보증금과 월세 등을 후원해 지난 1월 군포에 열매교회를 개척했다.

이 목사와 가족들이 전도에 힘써 열매교회 교인이 30명을 넘어섰다. 교인들은 매주 한두 가지 음식을 싸와 예배 후 감사의 식탁시간을 갖는다. 루게릭병을 알리고 환자들을 돕는 기부 캠페인에도 동참하고 있다.

이 목사의 셋째 누나 이복례(61) 권사는 한동안 동생의 갑작스러운 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권사는 “1년 전만 해도 운전하고 돌아다니고 그랬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동생이 몸을 못 쓰는 상황인데도 목회를 끝까지 하겠다고 하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안양과 안산, 시흥 등지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이 ‘똘똘’ 뭉쳐 이 목사의 목회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둘째 누나 이길례(63) 권사는 “동생이 물을 잘 먹지 않는다. 아마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릴까 봐, 보살피는 가족들에게 부담이 될까 그러는 것 같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형제들의 특징”이라고 전했다.

여름방학 중이라 한국에서 아빠 곁을 지키고 있는 누리씨는 “아빠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늘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빠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마치 천사 같다. 아빠를 위해 함께 기도해 달라”고 했다. 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목회자 아빠의 소망을 들어 드리고 싶다”며 “온 가족이 십자가 군병 같은 사명으로 전도하고 정성껏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의 후배 강희진(48) 아랍에미리트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는데 선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같이 있어주려 한다. 몸이 힘들고 아픈데도 끝까지 목회현장을 지키려는 선배의 모습에서 같은 목회자로서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부정확한 소리로 말씀을 나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복음사역자로 강단을 지킬 계획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몸짓, 눈짓으로, 스크린 예배라도 드리겠습니다. 제가 약해지니까 주님이 일하시고 가족과 성도들이 일하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가족, 한국교회 모두 사랑합니다.”

군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