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교회는 장로교의 칼뱅주의가 대세였다. 한국인이 가진 숙명론적 인생관과 칼뱅의 예정론이 절묘하게 상생했다. 감리교는 숙명론적인 세계관을 깨고 전도와 선교의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웨슬리 신학을 목회와 교회성장학에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가 다 있었다. 당시 감리교 신학을 보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상황신학이 대세였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감리교 신학이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상실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는 교세 약화로 나타났다.
‘사람에겐 현실적 요구가 있겠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영적 요구가 더욱 강하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웨슬리의 복음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웨슬리의 복음주의적인 선교와 이웃사랑 실천의 신앙을 한국교회에 적극 선포하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희년운동이다. 95년 8월 22일부터 세계 감리교 감독 150명을 광림세미나하우스로 초청해 감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27일부터 전국 성도 2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 체육관에서 ‘세계감리교 서울희년대회’를 개최했다.
감독회장을 지내면서 감리교의 부흥운동을 알리고자 ‘기독교 타임즈’를 만들었다. 인우학사를 다시 세우고 일영 감리교수양관도 건축했다. 종로에 있던 태화사회관을 서울 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겼다.
당시 감리교신학대 기숙사는 종합관 지하에 있었다. 얼마나 낙후됐던지 학생들이 두더지굴이라 불렀다. 후배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8억3900만원을 광림교회에서 기부해 2005년 300명이 생활할 수 있는 장천생활관을 지었다. 감신대100주년기념관 건축에도 힘을 보탰다.
세계선교에도 힘썼다. 1994년 세계 감리교 역사상 최초로 에스토니아공화국에 발틱미션센터를 지었고 미국 연합감리교회가 짐바브웨에 세운 대학에 100만 달러를 헌금해 채플을 지었다.
2000년에는 터키에 안디옥개신교회를 세웠다. 이곳은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시작한 선교발상지이다. 그런데도 2000년 동안 기독교계에서 잊힌 장소가 된 것은 터키가 모슬렘국가여서 교회를 복원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개신교회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왔던 안디옥교회를 21세기에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래서 도청 옆 구 프랑스대사관을 구입해 안디옥개신교회를 봉헌했다. 현재 터키 청년 40여명이 모이며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센터도 있다.
1999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교회를 건축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목사님 한 분이 사진을 들고 왔는데 누군가 마당에 있는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감독님, 암 환자들이 많은데 보호자들이 기도할 곳을 찾지 못해 이렇게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0억원으로 인근 부지를 매입해 한국 최초로 국립대 채플을 세웠다.
광림교회의 선교사역에는 때마다 기막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주님은 인도하시고자 하는 나라와 지역에 대한 측은함과 사랑의 열정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