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판단으로 의의 기준을 삼습니다. 내가 옳다고 강변하기만 합니다. 이런 삶을 살다 죽으면 죄가 가득해 결국 영원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의의 기준을 두면 주님과 영원한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진리가 인간의 눈높이로 낮아진 게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성경엔 이미 세상이 부패했고 이 땅에 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라고 인식하는 게 바로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무엇이든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가 없는 건물은 무너지고 공부도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내가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죽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죽는 것이죠. 옛사람과 나의 자아, 내 기분과 감정, 혈기와 교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왜 늘 죽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대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묵묵히 다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걸 다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죽어가는 교회와 나라, 가정을 보며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소리들 속에서 예수님처럼 ‘내 책임, 내 잘못’을 인정하며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죠. 왜 그럴까요.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예수님의 피 묻은 십자가는 나에게 조용히 다가옵니다.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나 혹은 잘못과 문제가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목사인 너의 책임이며 잘못이다. 모든 걸 내 잘못으로 인정하고 모든 돌을 다 맞으라. 그리고 죽으라. 네가 죽어야 죽어가는 교회와 나라, 병든 가정을 살릴 수 있다. 목사와 성도는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내 기준의 의로 죽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내 기준만으로 의를 지키다 싫증나면 언제든지 그 기준을 갈아엎고 팽개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주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더 나아가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기의 의’만 남은 삶이란 증거입니다. 그 믿음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믿게 해주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믿게 해 주시고 주님을 받아들일 때 내 의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 의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이죠.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난 죽은 존재가 됩니다.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인생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때입니다. “왜 나에게 돌을 던지느냐”고 항변하거나 “나에게 무슨 책임과 잘못이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책임을 떠넘길 때가 아니죠.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새사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가 죽어서 가정을 살릴 수 있다면, 또 내가 죽어 교회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죽어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바울의 외침이 내 가슴을 울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김명군 목사(김포 연결고리 패밀리처치)
[오늘의 설교] 죽어야 한다
입력 2018-09-17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