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후견제도, 필요성 커지는데 현실 여건은 미흡

입력 2018-09-13 04:02
차남인 A씨는 어느 날 치매 노모의 통장에서 2억원이 인출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범인은 어머니를 모시는 큰형이었다. 큰형은 “어머니가 사업자금에 보태라고 했다”며 둘러댔다. 의사결정 능력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를 꾀어 돈을 빼돌린 것이다. A씨가 사실인지 확인하자 어머니는 “응 그래그래”란 말만 반복했다.

B씨의 동생은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됐다. 법원은 B씨를 동생의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그 후 1년 뒤 B씨는 동생의 보험금 1억2000만원을 빼돌려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샀다. 결국 B씨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성년후견제도는 장애나 질병, 노령 등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해주고 재산과 신상 전반을 관리하게 하는 제도다. 적절한 후견인을 붙여 A씨 큰형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모를 이용해 돈을 빼돌리는 것을 막고 B씨처럼 피후견인 재산을 가로채는지, 후견 업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등을 법원 소속 후견감독관을 통해 감독한다. 후견인은 가족이나 친족, 친구 중에 지정할 수 있고 변호사나 사회복지사 등 제3자를 지정할 수도 있다.

매해 후견 개시 접수는 크게 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에만 최근 5년간 4327건의 후견 개시 사건이 접수됐다. 성년후견 개시는 앞으로도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평균 수명이 100세에 육박하면서 치매환자 관리가 사회문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의 치매환자는 68만여명에 달한다. 매년 4만명 정도 늘어나는 치매환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법도 개정됐다. 오는 20일부터 지방자치단체 장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치매환자에 대한 후견 심판 청구를 법원에 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 치매관리법이 시행된다.

이처럼 성년후견제도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현재 여건은 열악하다. 법원의 성년후견 전담 인력과 예산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공공후견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서울가정법원은 지난해 7월 후견센터를 열었다. 센터는 후견감독담당관 13명을 포함해 총 20명으로 꾸려져 있다. 후견 전담 단독재판부 법관 3명까지 포함하면 총 23명이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이 처리한 후견개시 사건은 1080건이었다.

성년후견의 사각지대도 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후견인에게 보수를 줄 수 없거나 무연고자여서 친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다. 법원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국선후견인제도를 시범 실시하고 있다. 변호사나 법무사, 사회복지사 등 가운데 후견인을 지정하고 대신 보수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보수는 20만원으로 매우 적고, 관련 예산이 1년 1억원 수준이다. 공공후견을 국가가 제도적·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체계적인 후견인 양성이 필요한 이유다.

성년후견제도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다. 하지만 직접 법원을 찾아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아직 성년후견제도에 대해 모르는 일반인도 많다.

후견이 개시되려면 우선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재판을 통해 이 사람이 후견이 필요한지를 가리는 것이다. 우선 법원에 후견 개시 심판 청구서를 낸다. 성년후견은 피후견인 주소지의 가정법원 및 지방법원이 관할한다. 법원에 직접 가서 제출해도 되고, ‘대한민국 전자민원센터’ 사이트에 들어가 청구서 양식을 다운받은 뒤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도 된다. 사건을 제출할 때 내는 송달료, 수수료 등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심사를 통해 일부 비용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청구서에는 청구인과 후견이 필요한 사람의 인적사항, 청구 취지, 재산 상황 등을 기재토록 돼 있다.

재판에서는 후견인 후보자가 적절한지, 피후견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등을 심리한다. 의사의 정신감정서도 필요하다. 본인 심문 절차도 거친다.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후견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후견이 개시된다. 후견인이 지정되면 법원은 직권으로 피후견인 재산 상황을 조사하거나 필요한 후견 임무를 명령할 수 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