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가이드라인도 안 지키는 ‘文정부 공공부문 정규직화’

입력 2018-09-11 18:26 수정 2018-09-12 22:01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7차 일자리위원회에서 일자리 창출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한국예탁결제원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추진 과정에서 관련 협의를 진행할 노동자대표를 졸속 선출토록 유도하고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한 정황이 포착됐다. 이는 정부의 정규직화 협상 가이드라인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다른 금융권 공공기관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돼 문재인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약이 표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일보가 11일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예탁원은 협상 시작 전인 지난해 12월 21일 경비, 시설관리, 환경미화 등 7개 직종 용역업체 관리자급 직원 7명에게만 이메일을 보내 다음 날인 22일까지 노동자대표를 선출해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는 3교대 체제로 근무하는 직원도 있어 하루 만에 전체 합의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메일을 받은 한 관리자급 직원은 이 같은 사실을 다른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임의로 자신을 노동자대표로 제출했다. 다른 관리자급 직원은 공지 내용을 알리지 않고 자신을 대표로 정한 뒤 동의서명만 받아 예탁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예탁원이 사실상 지목한 관리자급 직원들로만 노사 협의기구(이해관계자협의회)가 꾸려지게 된 셈이어서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발표한 가이드라인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사 당사자 등 이해관계자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협의기구가 구성·운영돼야 한다”고 적시했다. 실제 서울대병원의 경우 사무실 게시판에 관련 사실을 공지한 뒤 대상자 전원에게 개별 문자를 보내 노동자대표 후보 신청을 2주간 받았고, 대상 직원을 강당에 모아 대표자를 공개 선출토록 했다.

박봉규 노무사는 “정규직화 방안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협의체 구성 자체가 가이드라인에 적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도 사측이 대상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가 알 수 있게 대표자 선출부터 세부 일정을 다양한 식으로 공지할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일반 근로자의 의사가 대표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예탁원 측은 “파견법상 사측 직원이 용역회사 직원을 직접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예탁원은 비정규직 대표자 선출이 완료된 지 닷새 만에 협상을 시작했다. 여기서 자회사 설립을 통한 채용과 비정규직 노동자 개별평가 시행 후 정규직 전환 및 탈락 등 사안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탁원이 노사 협의기구를 통하지 않고 직종별 노동자대표를 한명씩 불러 개별 면담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개별 면담 때 예탁원 측이 노동자대표에게 논의사항을 함구토록 종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1∼3차 회의에 참석한 한 노동자대표는 “2차 회의 때는 개별적으로 사측과 면담했다”며 “사측에서 자회사 추진 등 사안은 최종 결정되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예탁원이 비정규직 직원 대상 설명회에서 가이드라인에 없는 내용을 거짓 전달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국민일보가 확보한 녹취록에는 예탁원 측 자회사설립추진단장이 지난 4월 설명회에서 “특수경비 업무는 다른 많은 회사도 문제가 돼서 (정규직) 전환을 안 해도 된다고 정부 가이드라인에 예외사유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고 말한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고용부 가이드라인에는 특수경비를 예외사유로 명시하지 않았다. 예탁원은 이에 대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낸 가이드라인을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고용부 관계자는 “과기정통부 가이드라인은 연구기관의 특성을 감안해 따로 작성된 것”이라면서 “타 부처와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예탁원은 협상 과정에서 ‘(협상과 관련해) 어떠한 이의제기도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일부 노동자들에게서 받아냈다는 사실도 최근 드러났다.

주택금융공사도 용역업체인 콜센터 정규직화 협상 과정에서 관리자급인 센터장과 팀장들에게만 대표자 선출 공지를 내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센터장들은 동의서를 받아 노동자대표가 됐다. 다만 주금공측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관리자들을 통해 절차개시를 개별고지하고 이를 각자가 인지했는지 확인받았다”고 해명했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회사 설립을 통한 우회 채용 대신 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기로 결정했지만 정작 노동자대표들은 사측 입장에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는 “가장 보호받아야 할 말단 비정규직이 관리직에 의해 배제되는 건 정부 정책 취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면서 “비인도적이고 파렴치한 행태”라고 비난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