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귀가 못한 가산동 아파트 53가구, ‘붕괴’ 트라우마 “공사장 소음에도 놀란다”

입력 2018-09-11 04:00

서울 금천구 가산동 아파트 주민 A씨(42)는 요즘 공사장 소음에도 깜짝 놀라는 일이 잦다. 지난달 31일 지반침하 사고 이후 생겨난 증상이다. 멀리서 나는 파열음도 바로 위 천장에서 난다는 착각이 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건물이 흔들리는 착각에 주저앉기도 했다. A씨는 10일 남편(45)과 함께 아파트 단지 내 구청이 운영하는 임시 상담소를 찾았다. 남편 역시 이틀 전 상담을 받았다.

지반침하 사고에 직접 영향을 받은 동에 사는 주민 B할머니(80)도 후유증이 심각하나 상담소는 찾지 않았다. 그는 “사고 뒤 나도 모르게 멍하게 멈춰 있을 때가 많다. 주변 다른 노인들도 일주일 넘게 비슷한 상태”라면서도 “그런 데(상담소) 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구청에서 현장 상담소를 운영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잇단 지반침하 사고 후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뒤 정부는 관련 매뉴얼을 만들고 상담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와 전문가들은 사고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날 가능성을 들어 상담 기간과 범위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금천구청에 따르면 지난 5일까지 사고 현장인 아파트 단지에 설치된 임시상담소에서 마음상담을 받은 주민은 29명이다. 지난달 31일부터 상담소가 운영된 걸 고려하면 하루에 다섯 명꼴로 상담을 받은 셈이다. 이들은 대부분 놀람이나 불안 등 어지러움 등을 호소했다. 노인 비중이 높지만 이들은 상담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 구청은 대피한 주민 68가구 중 9일 현재 53가구가 아직 귀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도 유치원 건물 붕괴 사고가 발생한 상도초등학교에 10일부터 임시 상담실을 설치했다. 유치원 원생뿐 아니라 학부모, 교직원, 상도초등학교 학생도 대상이다. 시교육청은 이날 학교 주변 공사장 합동 전수조사를 서울시에 제안하기도 했다.

박세란 서울디지털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재난사고 피해자들은 전형적으로 ‘회피’와 ‘각성’ 증상을 겪는다”고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도로 근처에 가기 힘들어하듯 공사 현장 가는 걸 어려워하거나 길거리를 다니는 일에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잠을 잘 못자거나 살짝만 접촉이 있어도 화들짝 놀라는 증상 역시 일례다.

과거 재난현장에서 상담을 진행한 한 상담사는 “연령대에 따라 상담을 받아들이는 성향도 달라 신청 여부도 차이가 난다”면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상담을 진행하기보다는 피해자 전원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은 “개인별 불안이나 감수성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정부에서 안심시켜준다고 해서 다 안심하는 게 아닐 것”이라면서 “사고 후에도 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발생 지역의 지반과 관련된 현실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안규영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