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난파 직전인데… 수장은 88일째 침묵 중

입력 2018-09-10 04:01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9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기밀문건을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뉴시스

대법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하다. 법원행정처 출신의 전·현직 부장판사들이 검찰에 줄소환되는 등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대법원은 최대 위기 국면에 있다. 지난 6일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무실이 검찰에 압수수색당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았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에 응하는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다. 법원은 사법농단 수사 관련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잇달아 기각하고 있다. 사법부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김명수 호(號)’가 위기를 정면으로 넘지 못하고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은 9일 대법원 기밀문건을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유해용 전 수석재판연구관을 소환조사했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진료’를 담당했던 김영재 원장 측의 특허소송 관련 정보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건넨 의혹을 받고 있다. 퇴직하면서 대법원 재판연구관 검토보고서 등 기밀자료를 무더기로 반출한 혐의도 있다. 2016년 6월 8일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통진당 사건 전합 회부에 관한 의견(대외비)’ 문건을 당시 재판 담당 대법원 재판부에 전달했다는 의심도 받는다.

앞서 검찰은 지난 6일 유 전 수석연구관을 고발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대법원에 보냈다. 지난 5일 대법원 문건 유출 혐의로 추가 요청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데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검찰이 이미 인지 수사를 개시한 상태”라며 “법원행정처, 나아가 대법원이 범죄혐의 성립 여부를 검토하고 고발 등 방법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검찰 요청을 거부했다.

검찰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과정에서 법원이 줄곧 비협조적이라는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왔다. 김 대법원장이 지난 6월 15일 대국민담화문에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힌 것과 달리 압수수색 영장을 ‘셀프 기각’하며 사실상 수사를 방해해 왔다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의 영장기각률이 2016년 기준 일반사건에서 10%인데 반해 이 사건에서는 89%다.

대법원은 이 같은 비판에 “영장 발부는 일선 법원 영장전담판사의 독립된 권한이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법원 행정과 재판을 철저히 분리하겠다는 것이 현 대법원의 개혁 방향이며 이를 위해서는 법관과 재판에 개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계속된 침묵에 대한 비판 여론은 커지고 있다. 수사를 검찰에 맡겨 놓고 ‘원칙’ 뒤에 숨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시민단체들은 지난 5일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 부재를 지적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법원의 현실은 암담하다”며 “모든 작업을 주도하고 지휘해야 할 어떤 사령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대법원은 오는 13일 사법부 창립 70주년 행사를 앞두고 있다. 내부에서 올해 행사를 개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아 최대한 조용히 ‘반성 모드’로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날로 대국민담화 이후 88일째 침묵 중인 김 대법원장이 행사에서 어떤 말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