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영천감리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일마다 설교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선교 비전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서울 대방동과 쌍림동 교회를 오가는 생활이 6개월간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짐이 하나도 없었다. 광림교회 성도들이 와서 집안 살림을 모두 교회로 옮겨놨다는 것이다.
“목사님께서 결정을 못하셔서 저희가 도와드린 겁니다. 빨리 오시라고 전 성도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절대 제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전 교인들이 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국방부 장관이 탄원서를 보고 감동했는지 그만 제대 특명을 내렸다. 국방부 핑계를 댔던 나는 달리 뭐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1971년 11월 군복을 벗고 광림교회에 부임했다. 500명 좌석에 150명이 앉아 있었다. 예전 전농감리교회에서는 40명으로 시작해 150명이 됐을 때 사임했는데, 이번엔 그만큼 광림교회 성도가 모인 것이다.
성도들의 얼굴엔 그 어떤 꿈이나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교회를 유지하겠다는 정도의 타성만 남아 있다고 할까. 교회는 서울시에서 300평을 불하받은 뒤 대금을 연체해 공매로 넘어갈 처지에 있었다. 이걸 해결하겠다며 교회 앞마당 일부를 임시 상가로 개조해 월세를 받아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교회 근처엔 충현교회 경동교회 장충단교회 같은 타 교단 대형교회들이 있었다. 그 위세에 눌려 광림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봉사나 선교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리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모이는 감리교회가 정동교회였는데 출석 교인이 500명에 그쳤다.
“여의도순복음교회나 영락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왜 우리 감리교회는 성장하지 못할까.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같이 조선 땅에 상륙했는데, 왜 감리교는 떨어지는가. 똑같은 성령이신데 똑같은 예수님이신데, 왜.”
매주 수요일 저녁을 ‘전도의 밤’으로 정했다. 예배 때 사도행전을 30분 동안 강의하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냈다. 나도 함께 나갔다. 전도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다들 머뭇거렸다. 그래도 내가 앞장서니까 순순히 따라왔다. 시간도 30분으로 정했다.
첫날 전도에서 66명이 교회에 나와 등록하는 결실을 맺었다. 성도들은 용기백배했다.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성령의 역사가 전도의 현장에서 더 강력하다는 것을 교인들이 충분히 체험한 것이다.
비전을 제시하고 전도를 시작하자 성도들이 불어났다. 150명이던 성도는 300명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0명을 돌파했다. 예배당이 꽉 찼다. 성도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자’는 비전이 멀리 있는 추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과 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