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덕꾸러기 된 10만원 수표, 시중에 돌아다니는 5만원권 89조

입력 2018-09-06 04:04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5만원 지폐와 10만원권 자기앞수표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지급 결제 시 신뢰도가 높아 오랫동안 현금처럼 쓰인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2009년 등장한 5만원 은행권의 위세에 눌려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은행이 5일 발표한 ‘2018년 상반기 중 지급결제동향’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자기앞수표의 하루 평균 결제규모는 1조817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7% 감소했다. 이 가운데 비정액권(1조6490억원)이 7.9% 하락한 데 비해 정액권(1670억원)은 배 이상인 16.1% 줄었다. 이는 10만원권이 지난해 상반기 470억원에서 올 상반기 350억원으로 24.8% 감소한 영향이 컸다. 5년 전인 2014년(940억원)과 비교해 3분의 1가량으로 쪼그라든 모양새다. 매년 20% 넘게 결제액이 줄고 있어 이 추세대로라면 사실상 결제수단에서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여기에다 모바일뱅킹 등 소액결제 수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천더기 신세가 된 이면에는 익명성과 지급 편리성을 갖춘 5만원 지폐가 있다. 가계나 기업의 80∼90%가 5만원 지폐를 비상금(또는 비자금)이나 거래용으로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처한 위기의 근본원인으로 지적된다. 발행 첫해인 2009년 10조원가량이던 5만원 지폐 발행잔액은 올해 6월 말 현재 89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발행잔액은 발권기관인 한국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뒤 회수되지 않고 남아 있는 돈이다.

6월 말 현재 전체 화폐 발행잔액 110조693억원 가운데 5만원 지폐 비중은 81.28%에 달해 사상 처음으로 81%대로 올라섰다. 한국은행은 그간 5만원 지폐가 ‘지하경제’를 조장한다는 지적을 의식해 1만원권 제조화폐 배정 시 5만원권 입금실적을 반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6월 말 현재 5만원 지폐 환수율은 48.25%로 석 달 연속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동훈 선임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