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가 뇌조(雷鳥)에게 충고했다, 태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태양을 노래하지 말라고. 그러자 뇌조는 자신의 시에서 태양을 빼버렸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라고 말했다. 라이너 쿤체의 시, ‘예술의 끝’에 나오는 내용이다. 쿤체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라고 써놓았다. “아름답게 캄캄해졌다”는 이 모순형용이 예술의 영역에서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처럼 아름답게 캄캄한 자리가 확보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보았다.
한 기관의 대표직을 수행하다 보면 종종 소통의 리더십을 요구받을 때가 있다. 소통을 잘하는 지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어떤 경우에는 나도 잘 모르는 내 속을 낱낱이 펼쳐 보여야 할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내 의도는 어떻다 저떻다 하며 설명이 길어지고 표정은 절실해진다. 그럼에도 돌아서 들려오는 말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뜻밖의 내용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역으로 ‘캄캄함의 신뢰’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한병철이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밝힌 것처럼 투명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아름답게 캄캄한 자리를 발견하고 나 혼자 흥분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 하나님이 앉으시는 자리를 나타내는 속죄소가 내게는 아름답게 캄캄한 자리였다. 속죄소는 모세의 증거판을 담은 법궤의 뚜껑으로 그 위를 그룹들이 날개를 높이 펴서 덮고 있는 곳이다. 그룹 날개 사이, 그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나주시겠다고 했다.(출 25:22) 하필 증거판을 담고 있는 법궤의 중앙부가 아니라 그 뚜껑이 쉐키나(Shekinah),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 덮인 뚜껑을 두 날개로 덮으면서 바라보는 천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덮여 있는, 은폐돼 있는 심연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덮여 있음, 그래서 캄캄한 곳. 이 자리야말로 신앙의 신비가 싹트기에 안성맞춤인 옥토일 수 있다. 그룹들은 덮여 있는 법궤 뚜껑을 덮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덮여 있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신비에 숨을 죽이고 떨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 무조건 다 열어젖히고 낱낱이 드러낸다고 해서 시원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다 몰라서, 모르는 그만큼의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 믿는다고들 하는데 사실 밝히 아는 것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알면 되는 것이다. 믿음은, 알지 못하지만 알겠다고 거기에 내 마음을 거는 것이다.
길이 환한 곳에선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다. 걸어가면서 내 튼튼한 다리를 대견해할 수 있고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맑은 눈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이 어두운 곳에서는 머뭇머뭇 자주 머물게 된다. 멈춰 서서 어두운 곳을 더 응시하게 되고 내 어두운 눈과 자주 걸려 넘어지는 못난 다리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나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가늘게 새어나오는 한줄기 빛에도 경탄하고 그 빛의 진실함에 어두운 몸 전체를 의탁하게 된다. 때로는 그가 다 말한다고 해서 그가 알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때로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그가 잠잠히 다물고 있더라도 그 속마음의 어떠함이 선연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니 소통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말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배운다.
지금 우리는 몰라도 되는 타인의 자잘한 일상까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소통이 잘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려져서 관계의 탄력과 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칼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에서 “알 수 없음의 배경이 없는 앎”은 필연적으로 왜곡된 행위를 낳는다고 보았다. 모름을 잘 견딜 수 있는 내성이 길러지는 아름답게 캄캄한 가을을 기대해본다.
김주련 (성서유니온선교회 대표)
[시온의 소리] 아름답게 캄캄한
입력 2018-09-06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