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설명서] 연합운동 상징, 한국 찬송가

입력 2018-08-31 17:34 수정 2018-09-03 17:16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송은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성도들에겐 곡조 있는 기도죠.

한국 찬송가의 역사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의 6대조 격인 ‘찬미가’가 원조입니다. 감리교에서 만들었는데 배재학당 교사였던 존스와 이화학당의 교사였던 로스와일러가 편집했습니다. 당시 조선인 중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음표 없이 가사만 수록됐습니다.

찬송가에 악보가 들어간 것은 2년 뒤 출시된 ‘찬양가’(1894년)부터입니다. 언더우드가 편찬 작업을 했는데, 117곡 중 한국인이 작사한 9곡이 최초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국내 선교의 양대 축은 감리교와 장로교(북장로교, 남장로교)였습니다. 감리교는 찬미가를, 남장로교는 찬양가를, 북장로교는 찬셩시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교가 1902년 ‘찬셩시’를 공인 찬송가로 인정하게 됩니다. 찬셩시에는 주옥같은 곡이 많은데, 지금도 성도들이 예배 때 즐겨 부르는 ‘예수 사랑하심을’(563장)이 나옵니다. “예수사랑하심은 거룩한신말일네 어린거시약하나 예수권셰만토다.” 어떻습니까. 110여년 전 가사가 지금과 매우 비슷하지요.

장로교와 감리교는 1908년 찬미가 찬양가 찬셩시를 하나로 묶어 ‘찬숑가’를 내놓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의 5대조 격인 찬숑가는 기독교 연합사업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찬숑가는 총 43판을 찍었는데, 자그마치 87만4500부가 보급됐습니다.

그러나 양대 교파 간 신학적 정치적 견해차는 찬송가마저 갈라놓았습니다. 1931년 감리교에서 ‘신정찬숑가’를 출간했고, 1935년 장로교도 ‘신편찬송가’를 내놨습니다. 2명의 고조할아버지를 둔 셈이죠.

해방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에서 찬송가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46년 ‘찬송가합동연구위원회’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49년 586곡이 실린 ‘합동찬송가’를 출간합니다. ‘찬숑가’ 이후 3대 교파가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합동찬송가는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의 증조할아버지 격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들이닥친 장로교 분열사태는 또다시 찬송가를 갈라놨습니다. 196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고신 등은 새찬송가편찬위원회를 만들고 ‘새찬송가’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서 예장통합과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합동찬송가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개편찬송가’(1967년)를 출시했습니다. 새찬송가와 개편찬송가는 현재 찬송가의 할아버지뻘 되는 찬송가입니다.

10년 넘게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면서 불편함이 생겼고 다시 찬송가를 통일하자는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결국 한국찬송가공회를 조직한 뒤 1983년 12월 558곡이 수록된 ‘통일찬송가’를 내놓습니다. 1984년 선교 100주년을 앞둔 쾌거였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645곡이 수록된 ‘21세기 찬송가’입니다. (재)한국찬송가공회가 10년간의 작업 끝에 2006년 만든 찬송가입니다.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128곡이 들어있는데, ‘예수 우리 왕이여’ ‘여기에 모인 우리’ 등 CCM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찬송가는 한동안 홍역을 앓았습니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사유화와 저작권을 둘러싼 법정다툼 때문입니다. 숱한 분열역사에도 불구하고 찬송가는 개역개정판 성경과 함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상징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