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여수서 소액재판 담당… 고액 연봉 마다하고 도전
전관예우 세상에 강한 울림… 법조인에 새로운 가치 제시 “봉사하는 자세로 임할 것”
박보영(57·사법연수원 16기·사진) 전 대법관이 ‘시골 판사’ 생활을 시작한다. 가장 큰(大)법관을 지낸 이가 가장 작은 시·군법원의 소액 전담 판사로 돌아가는 최초 사례다. 대법관을 지낸 뒤 고액 연봉을 제공하는 로펌으로 옮기는 등 전관예우의 길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온 법조계에 새로운 길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대법원은 박 전 대법관을 다음달 1일자로 신임 법관에 임명하고 광주지법 순천지원 여수시법원 원로판사로 지명했다고 29일 밝혔다.
시·군법원은 가장 작은 단위의 법원으로 청구 금액이 3000만원 이하인 소액 민사소송 1심 재판을 다룬다. 박 전 대법관은 여수시법원에서 이런 소액 사건을 맡아 소송 당사자를 만나고 사건을 직접 심리하는 일선 법관으로 일하게 된다.
지난 1월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박 전 대법관은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다. 최고위 법관 자리를 마친 뒤 높은 연봉을 받는 변호사가 되는 통상적 행보와 다른 선택이었다. 사법연수원과 한양대에서 연수원생, 학생들을 가르치던 박 전 대법관은 한발 더 나아갔다. 지난 6월 재판업무 복귀를 희망하며 법원행정처에 시·군법관 지원서를 제출했다. 법관인사심의위원회 등을 거쳐 다시 법관에 임명됐다.
박 전 대법관은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고 대법원을 통해 “봉사하는 자세로 여수시법원 판사 업무를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짧은 소감을 전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서민생활에 가장 밀접한 1심 소액 사건, 지역사회 현장에서 봉사하고자 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퇴임 대법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활동 영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서 “대법관 출신이 1심 재판을 직접 담당하면 재판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등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례가 좋은 시작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최근 김선수 대법관이나 이석태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다는 자발적 서약을 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전직 대법관들이 자기 이름을 상고 사건에 걸고 도장값으로 수천만원씩 받는 부끄러운 현상이 벌어져 왔다”면서 “앞으로 박 전 대법관과 같은 사례가 뒤따른다면 사법부의 신뢰 회복을 넘어 법조계 전체가 명예스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관예우 관행을 끊는 단초를 제공하고 경력을 사회에 공헌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법으로 강제하지는 않더라도 법률가 사회에서 공통된 관습, 가치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했다.
김영란(62·10기) 전수안(66·8기) 전 대법관에 이어 세 번째로 임명된 여성 대법관인 박 전 대법관은 전남 순천 출신으로 1987년 법관으로 임용됐다.
조민영 구자창 기자 mymin@kmib.co.kr
대법관이 ‘소법관’으로, 전관의 길 거부한 영원한 현역
입력 2018-08-29 18:30 수정 2018-08-29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