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새벽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중법정.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면을 그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민족문제연구소 제작)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국민참여재판(국참)이 선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배심원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공판기일은 당초 지난 27일과 28일 2회로 예정돼 있었지만 선고는 29일 새벽 2시를 넘겨서야 이뤄졌다.
이 사건은 한 다큐멘터리가 허위사실을 담아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는지가 쟁점이었다. 사흘에 걸친 공방을 벌인 검찰과 변호인은 최종 의견진술에서도 거의 3시간을 할애했다. 변호인이 “마지막으로 명예훼손의 고의가 있었는지에 대해 보겠다”며 프레젠테이션(PPT) 다음 장을 넘기자 배심원단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배심원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비비며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였다.
재판장은 “힘드시겠지만 12시가 넘어가면 대우가 달라진다”며 농담을 건넸다. 밤 12시를 넘기면 배심원에게 지급되는 돈은 8만원가량 늘어난다. 29일 오후 11시에서야 배심원들은 평의에 돌입했다. 재판을 시작한 지 약 13시간 만이었다.
국참은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제고하겠다며 2008년 도입됐다. 배심원을 한데 모으는 게 쉽지 않아 일반재판과 달리 통상 1, 2회 안에 심리를 끝내고 선고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 때문에 국참은 주로 밤늦게 끝난다. 그래서 더욱 명료하고 효율적인 설명, 변론이 검찰과 변호인에게 요구된다. 불필요한 공방이 벌어지면 재판부가 적절하게 소송지휘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은 여전히 국참에 서툰 듯 보인다. 수회 기일에 걸쳐 진행되는 일반재판에서는 쟁점에 대해 충분히 다투기 위해 증거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지고 든다.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기 위해 반박에 반박을 더한다. 이러한 재판에 익숙해진 법조인들은 지난한 법정 공방을 버티는데 인이 박인 사람들이다. 문제는 일반인인 배심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재판장은 배심원들이 지루해하자 “저도 어제 재판이 오후 11시40분에 끝났다”며 달랬다. 검찰과 변호인은 사료에 등장한 한 단어 ‘charge’를 두고 기소인지, 고소인지를 두고 수분간 갑론을박을 벌였다. 결국엔 재판장이 “우리가 모르는 영어 때문에 대한민국이 고생하고 있다”며 제지했다.
배심원을 설득하는 재판이면 그에 맞는 ‘눈높이 재판’을 해야 한다. 사건의 쟁점, 법적 용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있었다. 비유적 표현을 쓰며 이해를 돕거나 농담을 섞기도 했지만 진행 방식 자체는 과감히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연되는 역효과도 났다.
국참이 도입된 지 꼭 10년째다. 사법부는 국참이 활성화되지 못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배심원단 스스로의 책임감도 필요하지만 재판 진행 과정에서 ‘국민’인 배심원을 배려하고, 그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1, 2회 기일 안에 심리하고 결론을 내야 한다는 구조적 한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가현 사회부 기자 hyun@kmib.co.kr
[현장기자-이가현] 국민참여재판에 ‘국민’은 없었다
입력 2018-08-30 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