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동훈] 매파가 악당이라고?

입력 2018-08-30 04:04

중앙은행을 연금술사에 비유하곤 한다. 중앙은행이 돈을 직접 찍어 낸다든지, 공개시장 조작이나 기준금리 결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화량을 늘리고 줄인다고 해서 나온 얘기다. 기준금리를 결정하기 이전부터 금융시장에서 “동결”이니, “인상”이니 전망을 내놓으며 초미의 관심을 보이는 것도 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발언이 세계 모든 나라의 환율은 물론 주식과 부동산 시장까지 쥐락펴락할 정도 아닌가.

중앙은행의 연금술은 물가나 고용 성장률 등 언론에 등장하는 경제지표 몇 개만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고 수십 가지 통계치를 종합적으로 봐야 하는 고도의 종합예술이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이 작업을 연금술을 넘어 예지력이 필요한 점성술에까지 비유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길잡이별인 ‘북극성’이 자꾸 자리를 바꾸는 것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통화정책 결정의 고단함은 한국은행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최근 간담회 자리에서 만난 한국은행의 한 금융통화위원은 언론들이 금통위 의사록에 공개된 발언만 보고 매파니 비둘기파니 하며 이분법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매파’로 섣불리 낙인찍는 데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매처럼 하늘에서 비행하다 금리를 낚아채 올린다고 해서 매파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 수많은 지표를 검토한 결과 경기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인데 ‘악당’으로 몰지 말아달라는 주문이었다.

돈을 푸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책 당국자들조차 미래의 인플레를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돈을 풀어 경제성장에 보탬을 주는 중앙은행에 더 호감을 보이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른 게 없는 듯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는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이 저금리 정책으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도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집권하자 연준이 금리를 너무 빨리 올려 대규모 감세정책 등에 힘입어 고성장하고 있는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불만이다. 워낙 트럼프가 비상식적인 행태만 보이다 보니 미국에서는 그러려니 하며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 중앙은행 독립성이 훼손됐다며 비난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트럼프의 중앙은행 협박이 효력을 발휘하는 모양새다. 지난 22∼24일(현지시간) 미 와이오밍 주 잭슨홀에서 열린 연례 중앙은행회의에서 내년 금리인상 중단론 내지는 신중론이 급부상했다. 3명의 연방은행 총재가 금리인상 중지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월가에서는 이를 두고 연준이 비둘기처럼 고분고분해졌다(dovish)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한 가시적 경제성장 성과가 목표인 트럼프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임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공석인 4명 가운데 트럼프가 지명한 3명이 중간선거 후 상원 인준을 받을 가능성이 커 트럼프가 연준을 확실히 장악할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지명자들의 가세로 중도파 4명에 비둘기파와 매파가 각각 2명씩인 현재의 대칭구도가 비둘기파로 확실히 기울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에 중도파로 분류되는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은행 총재가 금리인상 중지론에 가세하며 비둘기파에 투항한 형국이다.

연준의 금리인상 시나리오는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초저금리 상황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다. 인상속도야 다소 조절할 수 있다 해도 억지로 정상화 시나리오까지 바꿔 놓으려 할 경우 부작용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금리인상 시기를 놓쳐 백약이 통하지 않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물며 연일 사상최고치를 갈아치우는 미국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자산버블이 쌓일 경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매파를 악당으로 몰아세우는 트럼프의 도박이 너무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다.

이동훈 경제부 선임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