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미덕이라는 것이 있다. 미덕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남보다 솔선수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가끔 우리 사회가 미덕이 사라진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는다.
학자들은 한국현대사를 크게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로 나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화 시대에는 ‘부자되세요’의 미덕(미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이 있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증대를 추구하는 미덕이다. 더 잘살기 위해 더 많은 재산, 부, 소득, 수익,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행위가 중시되는 것이고, 돌이켜 보면 산업화 시대 우리 모두는 그러한 대열에 합류했다.
사실 박정희 시대는 이러한 미덕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확대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잘나가는 수출기업이 되기 위해 모든 개인과 기업이 질주했고 그것을 다양한 정책을 통해 국가가 지원했다. 이러한 미덕 아닌 미덕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의 마인드에 뿌리를 내렸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나는 대형교회의 세습 같은 것도 이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산업화시대는 동시에 권위주의시대였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이러한 과정을 주도했고, 이 시대는 산업화의 모순과 권위주의에 대한 국민적 반대에 의해 민주화의 시대로 이행했다.
새로운 민주화시대는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와 이해(interest)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서 분노하고 참지 말고 행동하는 미덕이 강조되는 시대다. 권위주의 국가가 앞장서서 개인이나 집단의 권리와 이해를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미덕은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국가의 일방적인 하향식 통치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협치, 거버넌스 혹은 직접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름을 통해 상향식 행정과 정책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또한 이 미덕으로 산업화시대의 일그러진 대한민국을 변화시켜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산업화-민주화 ‘이후’ 시대의 미덕이 필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부자 되기와 자신의 권리와 이해를 위한 행동의 미덕을 조절할 수 있는 새로운 미덕이다. 미덕을 갖는다는 것은 개인이 행동함에 있어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점에서 그리고 이웃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할 것이다.
우리를 숙연케 하는 미덕은 자신의 부를 위해 질주하는 행위 속에서, 혹은 자신의 권리와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양보하지 않는 행동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물론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의 미덕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 미덕이 더욱 성숙하고 원숙해져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미덕을 키우는 것은 교육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오랫동안 교육의 모토는 지덕체(知德體)였다. 지적 발전을 돕고 건강한 체력을 갖게 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덕성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그동안 산업화의 미덕과 민주화시대의 미덕이 강조되는 속에서-그것이 갖는 긍정성을 전제로 하면서도-덕성, 그리고 미덕에 대한 고민이 과거형으로 치부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인공지능시대의 교육개혁을 이야기하더라도 결국 교육의 본질은 지덕체에 있다.
내가 서울교육청에서 ‘더불어숲의 교육’을 표방하고 이것이 더불어숲의 경제와 더불어숲의 사회로까지 확산되기를 소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나무 하나 하나의 이익과 권리, 이해를 넘어서 더불어 숲을 이루기 위한 미덕을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특별기고-조희연] 미덕이 사라진 사회를 넘어
입력 2018-08-30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