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육체가 아플수록 아픈 이에 더 큰 사랑 남기고…

입력 2018-08-29 00:01 수정 2018-08-29 14:58
박누가 선교사의 조카 김주희씨가 28일 오전 대구평강교회에서 드려진 발인예배에서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오고 있다. 대구평강교회 제공
박 선교사가 생전 필리핀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모습. 국민일보DB
동남아 오지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박누가(본명 박병출) 선교사가 지난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8세. 유족으로는 김정옥 사모와 2남이 있다. 길지는 않았지만 불꽃같은 삶이었다. 외과 전문의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걸 가장 큰 병으로 여겼다.

그는 의사였지만 치료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확신했던 신앙인이었다. 2004년 3월 카자흐스탄에서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울부짖으며 이렇게 기도했다. “의학은 사람이 만든 학문이고 치료는 하나님이 만든 작품 아닙니꺼. 맞지예. 살려 주이소. 이대로 데려가시면 안 됩니데이. 마 지금은 안 됩니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데이.”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후 무려 14년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를 주셨고 마침내 데려가셨다.

박 선교사가 필리핀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건 1989년이었다. 그는 루손섬 바기오 북부의 산악지대를 사역지로 택했다. 바기오에서 12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닿는 오지였다. 누구도 오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 박 선교사를 붙잡았다. 이후 필리핀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 오지만 찾아다녔다.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대형버스를 이동병원으로 개조해 의료 사각지대에서 주술에 기대 사는 이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의사인데도 그는 병을 달고 살았다. 워낙 오지를 다니다 보니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뎅기열 간염 등이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급기야 1992년 췌장암에 걸렸지만 다행히 초기여서 수술을 받고 완치됐다. 2004년에는 위암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낙심하지는 않았다. ‘치료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소신대로 수술을 받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말기 암이 쉽게 치유될 리 없었다. 몸을 혹사하니 제대로 된 회복도 기대할 수 없었다. 2009년엔 간경화에 당뇨까지 더해졌다. 2016년 5월 위암은 결국 재발했다. 고통이 더해질수록 그는 더욱 겸손해졌다. “아파 보니 환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박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닭 피를 치료제 삼아 죽어갔을 생명이 수천 명이었다. 그는 아플수록 더 큰 사랑을 나눴던 성자였다. 그와 이별한 슬픔 때문인지 장례가 진행된 대구엔 3일 동안 굵은 빗줄기가 쉬지 않고 내렸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