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이름부터 묻는 성폭력 신고 시스템, 디지털 혁신해야죠”

입력 2018-08-28 04:03 수정 2018-08-29 21:40
성폭력 피해 기록을 돕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리슨투미’를 개발한 김근묵 커넥트엑스 대표가 23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앱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성폭력 피해자가 상담하거나 신고할 때 이를 조사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묻죠. 피해자의 데이터가 넘어간 후에는 맘대로 고칠 수 없고 삭제도 안 돼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누가 선뜻 신고를 할까요?”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김근묵(58) 커넥트엑스 대표는 기존 성폭력 신고 시스템이 피해자의 ‘데이터 자기결정권’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성폭력 피해기록 앱 ‘리슨투미(listen2me)’를 만들었다. 모든 걸 걸고 ‘미투’하지 않아도,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연대할 수 있다. 성폭력 문제에 IT기술을 접목하는 시도다.

지난 4월 출시된 리슨투미는 사건 직후 피해자가 빠르고 정확한 피해기록을 남기도록 돕는다. 자신의 스마트폰에 기록하므로 개인정보는 필요 없다.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만들어진 문항별 가이드라인을 따라가 보면 기억은 구체적인 진술로 바뀐다. 따뜻한 위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조언도 담겼다. 기록은 사용자의 휴대전화에만 저장되고 ‘신고’라는 중대한 결정을 하기 전 몇 번이고 다듬거나 수정할 수 있다.

김 대표는 함께 핀테크 사업을 했던 팀원 3명과 지난해 1월부터 리슨투미를 개발했다. 미국에서 ‘미투운동’이 확산되기 전이다. 사업차 만난 여성 금융권 종사자 A씨의 고백이 계기가 됐다. A씨는 20년 전 직장 성폭력을 당해 지금도 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2016년 기준 경찰에 성폭력을 신고한 비율은 고작 2.2%이고, 상담소에서 상담한 비율은 0.2%”라며 “미투 이후에도 성폭력 예방교육과 강력한 처벌만 이야기하지, 어떻게 피해자를 보호해서 신고하게 할지에 대해선 고민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개인용 앱뿐 아니라 기업·기관용 솔루션도 개발했다. 한 기업이나 기관에서 성폭력 상습범을 색출할 수 있게 해 준다. 한 명의 상습범에 의해 복수의 피해자가 나오면 ‘누군가 나와 같은 사람을 지목했다’는 알림이 뜬다. 이 사실은 피해자 개인만 알게 된다. 김 대표는 “‘내 말을 믿어줄까’ 망설이던 피해자들이 충분히 준비한 뒤에 용기를 낼 수 있다. 같은 진술이 모이면 신뢰성이 높아진다”며 “가해자 중심이었던 성폭력 신고 시스템을 뒤집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기업·기관용 솔루션을 구매한 곳은 아직 없다. 이를 본 여러 공공기관·기업·대학 책임자들은 “숨겨져 있던 성폭력이 드러나겠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도입을 거부했다. 성폭력 신고율이 올라가는 ‘첫 번째 도입 사례’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 상담소 등도 예산이 부족해 갑자기 늘어나는 신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 대표는 “리슨투미는 건물 안에 있는 소화기 같은 존재”라며 “불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소화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접목시킬 예정이지만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 혁신은 스타트업이 혼자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며 “디지털로 사회를 혁신한다는 측면에서 리슨투미 솔루션을 기부할 생각도 있다. 이대로 도태되지 않도록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