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분실·일지 파쇄… ” 전·현직 판사들 증거인멸 정황

입력 2018-08-26 18:56 수정 2018-08-26 21:49

“절에 불공드리러 갔다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댓글 조작에 연루된 국가정보원 간부나 거액의 회삿돈을 횡령해 정치권에 금품 로비를 한 재벌그룹 임원의 진술이 아니다. ‘재판거래·법관사찰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에 출석한 현직 판사의 진술이다. 소환조사를 받은 판사 중 일부는 최근 휴대전화를 교체했다고 주장하며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렸다” “휴대전화 뒤판을 열고 송곳으로 찍은 뒤 내다 버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항상 그렇게 휴대전화를 버려 왔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업무일지도 파쇄해 내다 버렸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윗선’의 지시로 광범위한 증거인멸이 이뤄졌다고 보고 사건에 연루된 전·현직 판사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지난 23일 청구했지만 법원은 25일 이를 모두 기각했다.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압수수색을 통해 취득하고자 하는 자료를 (피의자들이) 보관하고 있을 개연성이 부족하다’ ‘압수수색에 앞서 (피의자들에게) 임의제출을 요구하라’고 했다.

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26일 “휴대전화를 버리고 업무일지를 파쇄하는 이들에게 임의제출을 요구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압수수색영장에서 ‘개연성’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며 “이런 비상식적인 영장 기각은 ‘재판 개입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라’는 노골적 요구”라고 반발했다.

박 부장판사는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도 기각했다. 고 전 처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인 2016년 2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행정처장으로 근무해 각종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있다. 특히 대법원이 2015년 6월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효력을 되살리는 결정을 할 당시 이 사건의 주심을 맡았다. 당시 행정처는 “청와대는 전교조 사건을 사법 최대 현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장 기각 대상에는 유모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재 변호사)도 포함돼 있다. 유 전 연구관은 대법원 근무 당시 ‘박근혜 청와대’ 관심 사건에 대한 재판연구관들의 보고서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게 유출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일각에선 박 부장판사와 유 전 연구관이 2014∼2015년 대법원에서 함께 연구관으로 근무한 인연이 작용해 영장이 기각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