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솔릭에도 끄떡 않는 ‘안전불감증’

입력 2018-08-27 04:04

나무 뽑힐 정도의 강풍에도 차량 운행·야외활동 다반사
안이한 인식 탓 아찔한 순간도… ‘단순’ 넘어선 ‘의도적’ 불감증
전문가들 “안전 우선 안 하면다음 재난 때는 더 큰 피해”


제주도에서 근무하는 소방대원 김지훈(가명·30)씨는 제19호 태풍 ‘솔릭’이 섬을 강타했을 당시 주민들과 실랑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풍의 위력이 가장 셌던 지난 23일 새벽 한 골목에서 트럭을 모는 50대 남성과 10여분간 말싸움을 벌였다. 강풍에 전신주가 쓰러져 길바닥에 전깃줄이 그대로 노출된 탓에 김씨는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성은 “밭으로 가는 길이 이 길밖에 없다”며 전깃줄을 밟고 지나가겠다고 우겼다. 김씨는 “감전사고 난다”고 수차례 말린 뒤에야 이 남성을 저지할 수 있었다. 김씨는 26일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본인도 밭에 빨리 가야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 그런 것 같다”면서도 “주민들이 안전문제를 가볍게 여길 때마다 솔직히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솔릭이 육지에 도달하면서 세력이 약해져 예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은 여러 곳에서 엿보였다. 태풍 피해 지역에서는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이 부는데도 감속하지 않고 차를 몰거나 평소처럼 야외활동을 감행한 사례가 많이 포착됐다.

특히 제주 주민들은 드러나지 않은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제주시에 사는 이모(61)씨는 지난 23일 비바람을 뚫고 집을 나서다가 크게 다칠 뻔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던 한 차량이 시속 40㎞ 정도로 달리다 이씨를 친 것이다. 이씨가 재빨리 몸을 피해 손가락만 스치는 정도로 끝났지만 자칫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운전자는 “폭우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고 사과했다. 이날 제주시 일강수량은 265.4㎜였다. 이씨는 “우산을 펼치자마자 우산살이 부러질 정도로 바람이 강했는데도 감속을 안 하고 달리는 차를 보니 황당했다”고 말했다.

제주시 애월읍에 사는 직장인 이모(25)씨는 출근하지 말라는 상사의 권유를 듣지 않고 차를 몰고 나왔다가 봉변을 당할 뻔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30분가량 달려야 했는데도 태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씨는 “와이퍼를 최대로 돌려도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바람에 차가 마구 흔들리니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민 스스로 안전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지 않을 경우 다음 재난 때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는 “태풍이 왔을 때 행동요령 중 하나가 운행을 자제하고 감속하는 것인데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단순한 안전불감증을 넘어선 의도적 불감증”이라고 지적했다.

우승엽 도시재난연구소장은 “이번에 각 시·도교육청이 휴업명령 문제를 놓고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결정을 내렸는데 휴업을 했다가 태풍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으면 ‘왜 호들갑이냐’는 비난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재연 권중혁 기자 jay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