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솔릭’이 중부권을 향해 북상 중인 2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쪽방촌. 한 판잣집 슬레이트 지붕 위에 타이어 7개가 흰색 줄로 묶여 있었다. 바람에 타이어와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군가 묶어둔 것이다. 10여년 넘게 이곳에 살았다는 70대 주민은 “여기는 태풍이 오면 지붕이 가장 취약하다”며 걱정스런 눈길로 지붕을 바라봤다.
같은 시간 서울 종로구 돈암동 쪽방촌에서 차동익(60)씨는 골목 컨테이너에 붙은 구청의 태풍주의 공지를 왼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었다. 차씨는 “이번 태풍은 달리는 열차도 넘어뜨린다는데 큰일”이라며 “내일은 집 안에서 TV만 봐야겠다”고 했다. 인근 주민 김영우(63)씨는 20㎝ 길이 십자드라이버를 오른손에 쥐고 이웃의 문을 고쳐주고 있었다. 김씨는 “다들 태풍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며 “쌍태풍이 온다는데 물건이 다 날아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쪽방촌 주민들의 태풍 걱정은 컸지만 적극적으로 피해 대비에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등포동 쪽방촌 주민 윤모(44)씨는 “태풍이 온다고 미리 대비하는 사람은 여기에 한 명도 없다”며 “당장 비를 피할 우산도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쪽방촌 골목에서는 태풍 피해 소식을 전하는 TV 소리만 들렸다.
골목 곳곳에는 양동이, 화분 등 강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법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다. 한 쪽방 앞의 카트 위에는 물통과 술병, 각종 쓰레기가 가득 차 있어 곧 넘칠 것 같았다. 태풍의 영향으로 이날 오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쓰레기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거나 빈 병이 굴러다녔다. 문래동 쪽방촌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게 쪽방촌 생활 아니겠느냐”며 “비가 집에 들이치지 않도록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립영등포쪽방상담소 박철민 간사는 “쪽방촌 주민들은 집을 고치거나 집안을 정비하는 등 태풍 준비를 할 만한 상태가 아닌 경우가 많다”며 “지붕 붕괴나 수도 역류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고 24일에는 집중 순찰을 돌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담소는 이번 태풍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면 임시로 옮겨 살 공간과 월세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가건물이나 오래된 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경기도 한 중소도시 가건물에서 10대 손녀와 살고 있는 장모(73)씨는 집안이 좁아 집 밖에 보관 중인 물건들을 묶어뒀다. 이 집은 지붕이 내려앉아 있는 상태지만 지붕을 고친다고 그 위에 올라갔다가 자칫 더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태풍에 대비할 여력이 안 되는 곳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낡은 원룸에서 가족 4명과 함께 사는 정모(47·여)씨는 집의 유리 창문이 다 깨져 있지만 교체 비용이 부담돼 이대로 태풍을 맞아야 한다.
주거환경이 취약한 아동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 있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경기아동옹호센터 김동민 대리는 “주거상태가 열악할 경우 전문가 없이 수리하거나 개·보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거주자가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별로 없다”며 “반지하방은 물이 들어올 때 대피할 수 있도록 준비하거나 물건을 밖으로 옮겨두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최예슬 권중혁 기자 smarty@kmib.co.kr
“태풍 치면 맞을 수밖에… ” 속수무책 쪽방촌
입력 2018-08-24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