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셋방살이 형편에 임신을 했다.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한 명이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십계명의 제6계명은 여섯 글자의 짧은 명령이다. “살인하지 말라.” 한자어로 생명(生命)은 ‘살라’는 명령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것을 명하셨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대홍수가 세상을 휩쓸고 간 땅에 남겨진 노아와 그의 가족을 향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라’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에게 눈물과 탄식, 원망 속에서 살지 말고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했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렘 29:5∼6)
아무리 눈물겹더라도 삶은 계속돼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죽지 말고 반드시 살아야 한다.
생명은 또한 ‘살게 하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십계명을 어길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제6계명을 이와 같이 해석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악한 일을 한 경우뿐 아니라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지 못하거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육체적 피해나 상해를 입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예방하지 못할 경우, 그는 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준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엄동설한에 입힐 옷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을 벌거벗겨 내쫓는다면 그가 얼어 죽도록 방치한 것이다.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굶어 죽도록 방조한 것이다. 그들이 죽을 때 그들의 피가 우리 손에 묻게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더 이상 사람이 굶어 죽거나 버림받아 죽지 않고 질병이나 재해로 죽지 않는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요구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자연과 생태계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노력까지 확대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이유를 간명히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 한마디 속에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가 담겨 있다. 우리는 생명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욱하는 마음을 자제하지 못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좌우로 갈라진 이념이 사람보다 먼저고 분노가 생명보다 먼저일 때가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다. 바로 나에게 주신 말씀이다. 살인하지 말라!
박노훈(신촌성결교회 목사)
[시온의 소리] 살인하지 말라
입력 2018-08-2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