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위해 바친 열정 ‘거룩한 꽃’으로 피다

입력 2018-08-22 00:00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맹의순의 생전 모습. 국민일보DB
친구처럼 지냈던 박재훈 목사가 맹의순이 쓴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거룩한 꽃' 악보. 국민일보DB
동요 ‘어머님은혜’를 작곡한 원로작곡가 박재훈(96·토론토 큰빛장로교회 원로·사진) 목사는 지난해 8월 ‘적(敵)이 사랑했던 성인’으로 불리는 맹의순(1926∼1952)의 일기를 묶은 ‘십자가의 길’(홍성사)을 읽다가 시 한 편에 시선이 고정됐다. ‘거룩한 꽃’이라는 시였다. 첫 줄을 읽는 순간 박 목사의 기억은 1949년으로 돌아갔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그는 21일 “무려 69년 전 일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이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맹의순은 6·25전쟁 당시 미군의 오해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후 부상당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치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다가 26세로 사망했다.

맹의순과 박 목사는 가깝게 지냈다. 1922년생인 박 목사가 네 살 형이었지만 둘은 우애가 깊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건 찬양이었다. 박 목사는 “조선신학교에 다니던 맹의순은 당시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를 했고 나는 대광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며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했었다”면서 “우리는 신설동에 있던 내 자취방에 함께 살며 신앙 안에서 교제하고 늘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매 주일 아침 당시 남대문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해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병원 심방’을 한 것도 그 둘이었다. 박 목사는 “지금 돌이켜봐도 맹의순은 아름다운 테너였고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매우 좋은 음악성을 갖고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소질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1949년 어느 날 두 사람은 맹의순의 자작시 ‘거룩한 꽃’을 놓고 마주 앉았다. 마치 애국자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시였다. 그는 박 목사에게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저 실로암 물가에 핀 한 송이 흰 백합. 한 떨기 향기 발하는 샤론의 장미꽃. 힘없는 발로 달리는 평화의 투사는 주님만 믿는 그 마음 거룩한 꽃일세. 찬 서리 매운바람이 부닥칠 시절에 저 고운 백합장미도 떨어져 시든다. 주 예수를 따라 싸우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 뒤를 따라 영원히 빛나게 살리라.” 짧았지만 찬양 가사로 안성맞춤이었다.

박 목사는 그러나 6·25전쟁 중 이 시를 적은 메모지를 분실하고 말았다. 여러 차례 집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맹의순이 누런 메모지에 시를 써서 전해준 그 순간의 기억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맹의순이 1952년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그 시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유언과도 같은 부탁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일생 그를 따라다녔다.

자신의 실수로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를 긴 세월 끝에 마주하게 된 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감격에 겨웠던 박 목사는 맹의순과 약속한 대로 곡을 붙여 시에 날개를 달아주기로 했다. 그는 “맹의순이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준 것이라 여겼다”면서 “지체하지 않고 즉시 작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성을 다해 곡을 완성한 박 목사는 1949년부터 시작된 맹의순과의 우정과 시, 메모 분실, 작곡 등의 긴 이야기를 편지에 담았다. 수신인은 남대문교회 손윤탁 담임목사. 그는 편지에 악보를 동봉해 지난달 9일 손 목사에게 발송했다. 남대문교회 왕보현 장로는 “책에 실린 시는 맹의순이 포로수용소에서 기억을 되살려 다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귀띔했다.

완성된 곡은 동요처럼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악보를 살펴본 백정진 베스퍼스 합창단 지휘자는 “박 목사는 동요와 찬송가, 오페라까지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작곡가인데 이 곡은 동요를 연상시킬 정도로 티 없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돋보인다”면서 “나라 사랑과 신앙고백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 시와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말했다.

맹의순은 정연희 작가의 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주인공이다. 6·25전쟁 직후 피난길에 올랐던 맹의순은 미군으로부터 인민군이라는 오해를 받아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다. 하지만 석방될 기회를 마다하고 부상당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의 발을 닦고 치료하는 등 복음을 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는 다음 달 10일 전북 익산 이리신광교회에서 열리는 103회 정기총회에서 맹의순을 순직자로 추서하기로 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