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에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씨가 얼마나 강력히 저항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판결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서부지법이 지난 14일 선고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김씨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만한 위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소극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나를 안게’라는 안 전 지사의 요구에 고개를 가로젓고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최대한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는 김씨의 진술에 대해 “피해자가 음주 등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거나 안 전 지사가 물리력을 행사한 상황이 아니다”며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해 관계를 맺었다고 보지 않았다.
재판부가 성관계 이후 김씨의 태도를 문제 삼은 대목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재판부는 “첫 간음 사건 발생 당일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물색한 점, 저녁에 와인 바에서 담소를 나눴던 점 등을 고려하면 간음 피해를 당했다는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9월 김씨가 안 전 지사의 담배 심부름을 수행하다가 간음 상황까지 간 것에 대해 오히려 김씨에게 책임을 물었다. 재판부는 “김씨가 업무 초기 때처럼 담배를 안 전 지사의 방문 앞에 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간음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안 전 지사의 사과에 이은 성관계 뒤 피해자가 문자메시지를 삭제한 데 대해선 “미투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피해자가 마지막 범죄 피해 증거를 삭제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재판부는 “경력에 맞지 않은 수행비서로 고용된 점 등을 볼 때 김씨가 그루밍(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자행하는 성범죄)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 위원의 의견도 배척했다. 재판부는 “그루밍은 주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며 “고학력에 사회경험이 상당한 김씨가 이에 해당되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법조계에서는 위력 간음죄를 협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류화진 영산대 법학과 교수는 지난 6월 발표한 논문에서 ‘피해자 동의 여부’가 위력 간음죄의 성립 요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력 간음죄는 법 자체가 피해자가 위계·위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성관계에 동의한, ‘하자(瑕疵) 있는 동의에 의한 간음’을 전제한다. 류 교수는 “재판에서 피해자는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비난을 받는다”며 “그러나 관계상 ‘을’에 위치한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주장이 나와도 위력 간음죄는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안규영 이재연 기자 kyu@kmib.co.kr
“담배, 문밖에 뒀어야”… 피해자 탓한 재판부
입력 2018-08-19 18:54 수정 2018-08-20 0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