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무죄’ 후폭풍… 이번엔 남성들도 힘 보탰다

입력 2018-08-19 18:53 수정 2018-08-19 22:20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열린 긴급 집회에 참가한 남성 등이 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무죄 판결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다.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선 시민 2만여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편파 수사, 편파 판결”을 부르짖었다. 성차별·성폭력 철폐 시위는 그동안 젊은 여성이 주축이었으나 이번엔 남성 참가자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340여개 여성·노동·시민단체로 구성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이날 안 전 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긴급집회를 열었다. ‘생물학적 여성’뿐만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위였다.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였고, 무엇보다 남성 참가자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안희정이 무죄라면 사법부가 유죄” “성범죄자 비호하는 사법부도 공범이다” 등 구호를 외쳤다. 이전 여성단체 시위에서 문제가 된 남성혐오 피켓이나 구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 유모(18)군은 “이번 판결은 권력자가 누군가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을 허용해준 거라고 본다. 잘못된 판결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남성의 시위 참여를 제한해 아쉬웠다”며 “편파 수사, 편파 판결이라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회사원 A씨(50)는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여성운동은 이미 돌이킬 수 없고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법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상대방의 권력을 아는 순간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력은 존재하는 동시에 행사 된다”며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대학생 B씨(29·여)는 독일인 친구 C씨(23)와 함께 참가했다. B씨는 “(안희정 판결은) 미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인데 무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국가가 나를 국민으로서 보호할 생각이 없다고 느껴 굉장히 화가 났다”고 말했다. C씨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며 “시위 현장에 나와 ‘여기 우리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온 최모(61·여)씨 역시 “판결이 절망적이었다”고 털어놨다. 머리카락이 희끗한 그는 “미투는 2016년 촛불시위를 완성해주는, 사회를 진정으로 개혁할 수 있는 운동”이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짓는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아 이를 지지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집회에선 고소인 김지은(33)씨의 입장문이 전해졌다. 김씨는 정혜선 변호사를 통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결을 하는 판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며 “바로잡을 때까지 이 악물고 살아 있겠다”고 말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씨는 “피해자답지 않았다고 질책한 비열한 꼼수가 판결문 전체에 가득하다”며 “가해자에게 물어야 할 성인지감수성을 피해자에게 물었다”고 비판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도 김씨를 공식 지지했다.

1차 집회 후 참가자들은 거리 행진에 이어 ‘피해자다움’ ‘성폭력’ 등이 적힌 30m 길이의 검은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스스로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자유 발언에 나서 “피해자다움의 기준은 누가 만드는 건가. 더 이상 피해자가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