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 묶여… 한국 금융, 살찌지도 죽지도 않는 좀비 됐다”

입력 2018-08-16 04:04

금융업계·관료의 배타성 규제 혁신 지지부진
문제 생기면 엄벌하는 식의 사후규제로 가는 게 바람직
시급히 풀어야 할 규제로 은행권 진입규제 완화와 빅데이터 활용 막는 개인정보보호법 등 꼽아


“한국 금융은 살찌지도 죽지도 않는 좀비가 됐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5일 한국의 금융산업을 이렇게 진단했다. 높은 진입 규제와 빽빽한 사전 규제 때문에 망하지도 않고, 혁신도 없는 ‘고인물’이 돼버렸다는 지적이다.

금융산업은 공공성이 강한 분야다. 금융회사 부실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일정 수준의 규제는 필요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미국을 필두로 일자리 창출, 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 움직임이 거세다. 로레타 메스터 미국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해 10월 뉴욕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려선 안 된다”고 했다. 금융규제가 금융시스템의 위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혁신까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만들어졌던 금융규제인 ‘도드-프랭크법’을 지난 5월 일부 풀었다. 중소형 은행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국민일보의 설문에 응한 전문가 10명은 국내 금융규제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불필요한 규제가 많다는 데 공감했다. 금융규제의 혁신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로 ‘금융업계와 관료의 배타성’ ‘규제 권한을 가진 금융 당국의 혁신의지 부족’ 등을 꼽았다.

이어 금융규제 혁신이 진보정부나 보수정부 모두에서 지지부진했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는 “정치권에서 금융규제를 정치적 이해타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며 “공무원도 규제를 해결하려다 잘못되면 큰 타격을 입는데, 이런 정책 결정의 책임구조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규제의 틀을 사전 규제(포지티브 규제)에서 사후 규제(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규제는 ‘네가 무슨 문제 일으킬 거 같으니까 아예 하지 마라’는 것”이라며 “사후 규제로 간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엄벌에 처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가장 시급히 풀어야 할 금융규제로 진입 규제를 지목했다. 진입 규제는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돼 왔다. 신규 금융회사를 인가할 때 금융 당국은 최소 자본금, 인력·설비 요건, 대주주 적격성 요건 등을 심사한다. 인가 권한을 금융 당국이 쥐고 있다 보니 과정이 불투명하고 재량에 좌지우지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시중은행 설립의 경우 자본금 요건도 1000억원에 이른다. 영국(65억원)이나 일본(196억원)과 비교해 너무 높다. 보험·증권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중은행을 포함해 은행권 진입 규제를 손봐야 한다. 새로운 은행이 진입 가능하도록 자본금 요건을 낮추고, 다양한 은행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개인정보보호법 규제 완화도 대표적인 숙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한국은 빅데이터가 있는데도 못 쓰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빅데이터 규제가 완화돼야 금융 소외계층에 중금리 대출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특정 개인의 정보를 안다고 기업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현재 규제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산업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대출심사를 할 때 개인 신용도를 더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개인정보 침해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특정 개인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등 ‘제어 장치’를 확실히 걸고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정보를 금융상품 개발이나 대출심사에 활용하되 다른 분야에는 쓰지 못하도록 제한을 거는 식이다.

나성원 양민철 임주언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