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다시 생각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

입력 2018-08-16 00:01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장)는 장구한 교회 역사와 현대교회 강단에서 수없이 해석되고 가르쳐졌다. 모두에게 친숙한 이야기이기에 굳이 사족을 보탤 의도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강도 만난 사람’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 누구인지, 이타적으로 그를 도왔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현대적 적용은 무엇인지, 도대체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슨 핑계와 합리화로 피해자를 외면한 것인지,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현대교회가 짐짓 회피하고 있는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지 등 지금도 던져지는 질문들이 이 비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현대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불편해지는 지점은 강도 만난 사람을 앞장서서 도울 것으로 기대됐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유기다. 만일 제사장과 레위인을 종교법정에 소환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회 칠한 무덤’(마 23:27)처럼 고상하고 설득력 있게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합리화와 핑계가 죄성의 본질임은 첫 인류의 타락 기사에 잘 나타난다.(창 3:12∼13)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속담 역시 타락한 인간 본성이 빚어내는 자기합리화의 민낯이다. 역사상 법정에 선 범법자들 중 핑계 없는 피고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때 제사를 집례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이었는지 모른다. 그 중요한 모임에 지도자가 늦어서야 되겠는가. 예배시간이 그토록 촉박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백 번 양보해, 제사에 늦을 각오로 피해자를 돕는다 치자.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살았어도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망할 수도 있는데, 제사 전에 시신을 접해서는 안 된다는 정결 규례를 평신도도 아닌 지도자가 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이 주일이 아닌 월요일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얼마나 당당하고 합리적인 이유인가.

문제는 그들이 율법의 조문에는 밝았지만 율법의 정신에는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구약의 율법은 문자적 이행(율법주의)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초등교사(갈 3:24)이므로 그 의도 및 정신을 제대로 이해했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외면한 채 조문에 집착하는 종교인들을 매몰차게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국정농단 사태 이래 적폐청산 정국을 지나면서 우리는 불법을 방치하거나 도리어 옹호한 일부 검찰과 사법부의 ‘법꾸라지들’에 경악하며 분노하고 있다. 헌법의 조문에는 밝지만 헌법의 정신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그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라 헌법에 무식한 집단이다.

헌법 정신에 입각해 나라를 바로잡아야 할 그들이 도리어 법을 뒤틀고 남용함으로써 나라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에 해박하면 성경적인 사람일까. 구약성경에 해박한 율법사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았고, 당대 최고의 율법사 가말리엘에게 수학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지 않았는가.

신약신학자 스콧 맥나이트는 그의 저작 ‘예수신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성경을 요약하심으로써 복음의 핵심이 ‘율법 사랑’(love of the law)이 아닌 ‘사랑의 율법’(the law of love), 즉 율법의 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설명하셨다고 말했다. 율법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이시므로 율법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 그 눈에서 율법주의의 비늘이 떨어진 사울은, 참된 예배는 의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쁘신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데 있음을 고백한다.(롬 12:1∼3)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았다면 제사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이웃이 됐어야 한다. 현대교회도 종교적 의전에 함몰되기보다 강도 만난 이웃들에게 적극 다가가야 한다.

정민영 (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