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대성당서 만난 젊은 여성
지난 4월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산타마리아델피오레 대성당)로 들어가는 길에 젊은 동양인 여성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 행렬인지를 물었다. 그가 내민 수첩에는 피렌체 주요 관광지 이름이 영어와 한글로 적혀 있었다. 한국인이었다. 20대 후반이나 갓 서른이 됐을 법해 보인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자유를 누리면서 생각도 정리할 겸이라고 했다. “퇴사를 미리 알렸는데도 출국 전날까지 출근해 일을 해야 했어요. 회사란 게 그런 곳이죠.”
성당 안에 발을 들이기까지 띄엄띄엄 퇴사 이야기를 들으며 회사를 떠나거나 옮긴 지인들을 떠올렸다. 직장생활은 업종과 직무, 기업 규모 등에 따라 제각각이건만 젊은 직장인의 회사생활 얘기는 퇴사 여부를 떠나 대체로 비슷하다. 사생활이나 휴식 보장은 고사하고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히다시피 한 조직 생활, 권위적인 상사들, 뒷북도 제대로 못 치는 땜질식 사업과 ‘아님 말지’ 식 조직 개편, 보람도 성장도 없는 기계적 업무, 어디까지 해내나 보자는 듯 가중되는 노동 강도,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급여….
마치 침몰 중인 거대한 선박을 연상시키는 회사와 그 안에서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 그로 인한 무기력감과 불안감,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다는 위기감. 이런 것들이 회사라는 관성 밖으로 젊은 직장인들을 튕겨내고 있다. 그리고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런 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퇴사 유행, 이상할 게 없다
퇴사 경험자인 작가 오지혜는 에세이 ‘지혜로운 생활: 두 번째 퇴사, 그래도 잘 살고 있습니다’에서 “퇴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몇 번의 시작과 그만둠을 반복하며 내게 맞는 일과 회사를 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썼다. 회사의 실상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므로 겉모습만 보고 들어간 뒤 내부에서 갈등을 겪는 현상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청년층을 중심으로 두드러지는 퇴사 현상의 이면에는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세대적 특성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다. 경직된 조직 분위기와 일만 하는 식의 근로문화가 청년들의 퇴사율을 높이는 요인이다. 여기에 자신의 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일단 취직하고 봐야 할만큼 심각한 취업난도 원인이다. 청년들이 공공기관과 대기업으로 몰리는 현상, 중소기업 구인난, 퇴사 확산 경향이 모두 맞물려 있다. 청년들이 추구하는 건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 ‘(남보다 혹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다. 이런 삶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로 청년들이 대기업에 몰리면서 중소기업은 구인난을 겪게 되고, 청년들은 입사 후에야 그곳에서는 그런 삶이 가능하지 않음을 절감하며 퇴사를 고민한다.
청년들이 바라는 행복과 만족감은 고액 연봉이나 탄탄한 복지, 회사의 이름값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대기업 퇴사자가 끊이지 않는 현실로 알 수 있다. 10년 정도 다닌 대형 금융회사를 지난해 그만둔 김모(37)씨가 말하는 퇴사 이유는 이렇다. “회사에 매여 가족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상사의 억지 지시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욱 뺏겼죠. 대기업이라 돈을 많이 준다고 하지만 내가 받는 스트레스와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충분한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삶을 평생 살기는 싫었습니다.”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한 김씨는 “아직 밥값을 버는 수준이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서강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김초롱씨는 석사학위 논문 ‘대기업 청년 퇴사자의 개인화된 일과 삶’에서 “청년들이 취업을 통해 얻고자 한 연봉, 복지, 사회적 인지도 등은 실제적 직장 만족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취업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근로 환경과 조직문화 같은 요인이 매우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과거에 비해 이상을 추구해볼 만큼 강화된 개개인의 능력,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사업 구상을 실현해볼 수 있는 사회·기술적 환경, 여러 매체를 통해 활발히 공유되는 퇴사 경험담도 퇴사 확산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퇴사자들은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도 하지만 아이디어를 앞세워 소규모 창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로 나서기도 한다. 직업을 만든다는 의미의 ‘창직’이나 ‘1인 기업’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이직을 하더라도 같은 업종 내에서 규모가 더 큰 회사로 옮기기보다 월급을 덜 받더라도 근로 여건이 낫거나 적성에 맞는 곳으로 가는 경향이 짙어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새로운 업종으로 전직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일을 당장 찾지 못했거나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여행을 떠나거나 대학원 등에 진학하는 편이다. 가족을 이끌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청년 귀농인도 드물지 않다.
퇴사 유발 요인들
퇴사 요인은 열악한 근로 환경, 불합리한 조직문화, 보이지 않는 미래로 정리할 수 있다. 과중한 노동 강도, 일과 삶의 불균형, 일방적 직무 배치, 고용 불안정은 청년들이 퇴사를 생각하게 만드는 근로 환경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근로계약서상의 근로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실제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퇴사를 고민 중이라는 중소기업 회사원 신모(32)씨는 “정식 출근이 오전 9시인데도 부서나 상사에 따라 8시 반, 8시, 심지어 7시 반까지 나오도록 하고 저녁 6시에는 저녁을 먹자며 끌고 간다. ‘집에서 잠만 잔다’고들 하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다시 회사로 나오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일은 일대로 시키는 상사가 “넌 쉴 때 뭐 하느냐”고 묻고는 직원이 “너무 피곤해서 잠만 잔다”고 하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연애해라” 같은 훈계를 늘어놓는 촌극도 흔하다.
저녁시간은 물론 주말과 휴가 등 엄연한 휴식 권리를 뺏길 때 퇴사 욕구가 폭발한다고 직장인들은 말한다. 입사 3년 만에 퇴사한 뒤 이직 준비를 하고 있는 이모(29·여)씨는 “회사의 부속품으로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버텨야 하는가 싶었다”며 “일을 오래 하려면 회사생활과 개인생활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그 균형이 일방적으로 깨지니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불합리한 조직문화로는 권위주의와 명령하복식 상사와의 관계, 휴식과 사생활 미보장, 잦은 야근과 회식 강요, 비효율적 업무 체계, 부적절한 보상 등을 들 수 있다. 직원을 직접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상사는 즉흥적인 퇴사를 유발하는 최대 요인으로 꼽힌다. 옴니버스 형식의 퇴사 에세이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에서 저자 안미영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복(福)’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반대로 상사복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은 좀 더 자주 봤고, 상사가 퇴사 사유 중 일부가 된 경우는 많았다”고 했다.
권위주의 조직문화에서는 자발적으로 일할 수 없고 만족감도 느끼기 어렵다. 억압적인 조직문화는 온순한 직원까지 거래처 등에 ‘갑질’을 하게 만든다. 창업을 준비 중인 정모(33)씨는 “위에서 계속 윽박지르고 쪼아대니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약 업체에 결국 그런 식으로 닦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정체성이 위태로워졌다고 생각한 것도 퇴사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청년 직장인들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만드는 건 업무와 적성의 불일치, 롤모델 부재, 성장 정체, 심신 악화 등이다. 자신의 향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롤모델이 회사에 없다는 사실은 청년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회사에 남아 있으면 자신의 상사들처럼 될 것 같아 퇴사하기로 마음먹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한모(35)씨는 “전 회사에서 부장은 저녁에도 퇴근하지 않고 늦게까지 남아 있고 주말에도 굳이 나와 일을 찾아서 했다. 부장이 되고 더 개인생활을 포기한 것 같았다. 이미 퇴사를 고민하고 있긴 했지만 부장이 ‘너희도 부장이 되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최종적으로 결심했다”고 했다.
몇 차례 이직을 거쳐 자기 사업을 준비 중인 김모(40)씨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됐다고 해서 평생 그 일만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해봤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삶은 어떤 시점에서도 재설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두려움 앞에서 ‘희망’을 쓰다 “저 오늘 그만둡니다”
입력 2018-08-18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