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떨어진 판사의 신뢰, 국민참여재판이 심폐소생할 수 있을까

입력 2018-08-18 04:04
사진=윤성호 기자
안모(33)씨는 2016년 7월 자신에게 취업을 하지 않는다며 욕설을 하고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안씨의 아버지는 평소 술에 취해 가정폭력을 일삼은 것으로 조사됐다. 안씨에게는 존속살해 혐의가 적용됐다. 국민참여재판(국참)으로 진행된 안씨 재판에서 배심원 5명이 징역 5년, 4명이 징역 6년의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배심원 평결을 받아들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비록 부모로서 부족한 측면이 있었을지언정 병을 앓고 있던 아내를 부양하는 등 나름 애써온 아버지를 살해한 죄질이 나빠 엄중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안씨가 자백하고 반성하는 점,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며 고통을 겪던 중 우발적으로 범행한 점 등을 고려했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살인의 죗값으로 징역 5년은 적어 보일 수 있다. 존속살해죄의 법정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 7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다. 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박모(54·여)씨의 수기에는 국민의 법 감정과 실제 법정형 간 괴리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16년 대법원이 진행한 국참 수기 공모전 당선작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들의 칼에 일곱 번이나 찔려 사망에 이르게 된 반인륜적 사건이었다’고 서문을 연다. ‘택배 일로 하루를 겨우 버티는 아버지의 눈에 아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버지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며 피해자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박씨의 생각은 달라진다. ‘중형이 마땅하다 생각했던 나는 변호인의 변론을 듣고 감형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며 ‘죄는 지었지만 인간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어 ‘살아있는 자의 인생 또한 소중한 것이라는 배심원들의 의견이 나왔다. 그에게 앞으로 살아갈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또 안씨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던 장면을 회상하며 ‘어머니도 울고 피고인도 울었다. 엄벌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현재 간경화를 앓는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뜻도 포함돼 있었다’고 마무리했다.

도입 10년 지났지만… 지지부진한 국참

“피고인은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습니다.”

국참이 2008년 도입된 이후 거의 대부분 재판의 첫 공판기일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재판장은 첫 공판기일에 국참을 원하는지 피고인에게 의사를 물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24일 첫 공판기일에서 국참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다른 국정농단 피고인도 일반 재판을 희망했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국참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회적으로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은 대부분 일반 재판으로 진행된다. 이유는 국참이 법률상 ‘신청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참이 적극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로 법조계가 입 모아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고인이 원하지 않으면 국참을 진행할 수 없다. 피고인이 원한다고 해도 재판부가 직권으로 ‘배제’ 결정을 할 수 있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와야 한다거나 쟁점이 복잡해 심리가 길어질 것으로 예상돼 국참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등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국참 실시율은 30∼40%대에 머무르고 있다. 2011년 51.2%로 정점을 찍은 뒤 답보 상태다. 신청사건이 아닌 대상사건(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사건)으로 표본을 확대하면 실시율은 대폭 떨어진다. 2008년부터 2017년 대상사건 14만3807건 중 5701건에 대해 신청이 접수됐고 이 중 2267건만 국참으로 진행됐다. 대상사건 대비 실시율이 1.58%에 그친 셈이다.

고민하는 사법부, 결국엔 입법 문제

사법부는 국참을 활성화하기 위해 수년째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2014년 대법원 국민사법참여위원회는 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법무부를 통해 정부입법을 시도했다. 주요 골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 배심원 평결의 효력을 인정하고 신청이 없어도 재판부 직권으로 국참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정안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위원회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국참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최근 대법원은 형사합의부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었다. 재판부 만장일치로 관할법원을 지방법원 지원으로 확대하고 고의 살인 범죄 등 중범죄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국참을 선택하도록 하는 건의문을 내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간담회나 사법발전위에서 논의되는 내용도 결국 입법이 돼야 실현될 수 있다”며 “19대 국회 때처럼 법무부와 함께 정부입법을 시도하거나 의원 발의를 위해 국회를 설득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법부는 왜 국참을 심폐소생하려 하나

국참은 품이 많이 드는 재판이다. 만 20세 이상 국민을 상대로 배심원을 선정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일반재판의 경우 변호사나 검사는 서면으로 의견 진술을 대신할 수 있지만 국참은 그럴 수 없다. 변호사나 검사는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쟁점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한다. 재판부도 일반재판은 수차례 공판을 거치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심증을 형성해 나갈 수 있지만 국참은 1∼2차례 공판 끝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법률상 공판 횟수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매번 배심원을 한데 모으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국참은 통상 1∼2회 내에 선고가 이뤄진다.

국참을 신청했을 때 혹여나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인식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법원이 지난해 일반인과 소송관계인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피고인의 90%가 ‘변호인이 권하지 않아 국참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또 변호인의 30% 이상이 ‘판사가 참여재판을 싫어할 것 같아 국참을 철회했다’고 응답했다.

사법부가 국참을 ‘심폐소생’하려는 이유는 사법부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판단하고 있어서다.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사법부에 국참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몇 차례 국참을 진행한 한 부장판사는 “국민의 의견을 반영해 법적 판단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는 데 국참은 효과적인 제도”라고 말했다. 그는 “평결 과정에서 배심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것이 국민의 법 감정이고 법 상식이라고 생각하면 재판부 입장에서도 납득이 되고 판단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한계가 있다”며 “국참은 사법의 정당성, 공정성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