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의 한계… 위기 맞은 ‘21세기 술탄’

입력 2018-08-14 18:19 수정 2018-08-14 21:43
사진=신화뉴시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하며 ‘21세기 술탄’에 등극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으로 촉발된 경제위기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과도한 경제 개입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경제위기는 신흥국을 넘어 유럽 등 선진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6월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승리하며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운하와 터널, 교량 건설 등 ‘메가 프로젝트’라 불리는 개발독재 정책으로 경제성장을 견인하겠다고 장담해 왔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터키 경제위기로 권위주의적 경제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3일(이하 현지시간) 분석기사에서 “터키 경제위기는 상당부분 에르도안 대통령 스스로 만든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와 대(對)터키 제재 우려와는 큰 관련이 없다”며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통화정책과 국제금융시장의 논리를 무시하는 등 경제 개입을 강화해 왔다”고 지적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건설경기 부양과 고성장을 위해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을 유지해 왔다. 중앙은행과 금리정책을 더 강력한 통제 아래 두겠다는 의향도 내비쳤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외채와 경상수지적자 누적 때문에 저금리 정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터키 경제는 이미 침체 상태에 접어들었으며 저금리가 야기한 인플레이션은 국민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터키 경제가 구조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개혁 작업에는 언론자유 인정, 사법부 독립, 의회권력 회복, 정치범 석방 등도 포함된다. 우미트 파미르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주재 터키대사는 NYT에 “터키 스스로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것만이 투자자들을 되돌릴 것”이라고 말했다.

터키 리라화가 연일 폭락하면서 신흥국 화폐 가치도 함께 출렁이고 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13일 한때 1달러에 30페소까지 올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해외 투자자 유출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40%에서 5% 포인트 인상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 역시 달러당 14.42랜드로 전일 대비 2.77% 하락하며 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번 위기가 포르투갈,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로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터키에 투자한 유럽의 금융기관들이 위험에 노출됐다는 ‘터키 익스포저(Turkey exposure)’ 용어도 등장했다.

한편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세르다르 킬리치 미국 주재 터키대사를 만나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 석방 전에는 터키 측과 협상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미국산 전자제품 불매운동을 거론하며 ‘배수진’을 쳤다. AP통신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14일 TV 연설에서 “미국이 아이폰을 만들지만 삼성도 휴대전화를 만든다. 터키에는 ‘베스텔’(터키 전자제품 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자국민들에게 국산 제품이나 미국산이 아닌 수입품을 사라고 호소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민간이 보유한 달러화를 리라화로 환전하라고 당부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