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학교길병원에 ‘새노조’가 들어섰다. 보건의료노조 가천길병원지부의 조합원수는 1052명으로 기존 노조(이하 구노조)보다 조합원 숫자에서 월등히 앞선다. 흥미로운 건 비교적 단기간에 폭발적인 가입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을 두고 혹자는 “그간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더 나은 병원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평가한다. 이유는 많겠지만 확실한 건 익명 오픈채팅방인 ‘길병원 직원 모임’에 참여한 병원 노동자들의 일관된 목소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이다.
현재 익명 오픈채팅방 ‘길병원 직원 모임’에는 13일 기준 800여명의 병원 노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앞서 간호사 장기자랑 파문으로 촉발된 한림대의료원의 노조 설립에서도 오픈채팅방의 위력은 ‘입증’된 터. 이번 길병원 직원 모임 역시 새노조 발족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오픈채팅방을 통한 각종 제보와 민원도 쏟아지고 있다. 기자도 채팅방에서 신분을 밝히고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백 명의 서로 다른 이들의 주제는 하나, “더 나은 길병원”이었다. 물론 새노조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도 이곳에서 숨죽이며 대화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픈채팅방에선 병원의 미세한 움직임에 대해 활발한 대화가 실시간으로 이어진다. 최근의 인사이동부터 길병원 새노조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오면 칭찬과 공유 릴레이가 이어지고, ‘어중간’하거나 ‘물타기’로 추정되는 기사에 대해선 가차 없는 비판이 오간다. 한때 1000명의 채팅 인원은 1200명까지 이어졌고, 제2의 직원모임 채팅방이 만들어지는 등 새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훨훨 불타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감정의 공유였다. 이곳에서 오간 재미있지만 날카로운 대화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과 19일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고 희망에 불과했던 일들이 새노조 길가족님들의 의지로 일어나고 있어요”, “뜨거운 바람의 선풍기에 행복해하라던 길병원 사측님들, 신의료기기는 왜 들이며 건물들은 왜 리모델링하는 건가요”, “(병원은) 천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에게 공지하나 붙일 게시판 하나 내어주지 않나요”, “새로운 간호팀장님들은 제발 갑질 좀 하지 마세요”, “(우린) 청소도 직접 다하고 물품도 자비로 사서 쓰고 (의료기관평가)인증때 까까사먹으라고 만원 받아요” 등.
강수진 지부장은 새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대가 컸다고 밝혔다. 강 지부장은 “병원은 인력이 부족하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다. 길병원 노동자들은 사력을 다해 환자를 돌보고 업무를 수행했지만, 노동 환경이나 복지 및 인간적인 부분의 보장이 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이러한 의견이 모아지면서 새노조가 만들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실 지난 1999년 가천길병원에선 새노조 설립이 좌절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복수노조 설립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론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 컸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리고 당시 새노조 설립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다음은 이철행 보건의료노조 가천대길병원지부 부지부장이 조합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중 일부다.
“당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힘차게 시작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건 인당 1000만원의 가압류와 부당한 부서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조합원들의 조합 탈퇴. 협박과 회유에 우리와 멀어져가는 조합원들을 보며 우리는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중략) 여러분, 지난 20여년의 시간이 흐를 동안 과연 이곳은 얼마나 변했을까요? 병원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동안 우리 직원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습니까?(후략)”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도 “당시에도 길병원에는 다수의 조합원이 소속된 노조가 있었지만, 그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개선되지 않았다. 당시 새노조 설립에 관여한 노동자들은 사측의 감시와 해고, 부서 및 인사이동 등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새노조 설립 과정에 참여한 김형식 보건의료노조 조직2실장으로부터도 비슷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김 실장은 “19년 전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사측의 부당노동행위가 예상됐고 실제로 이번에 새노조가 만들어지고 나서 새노조 가입을 방해하거나 병원 보직자들이 가입을 막는 등의 여러 부당 노당 행위가 있었다”고 말했다.
좋은 ‘스타트’만큼, 기대가 큰 만큼,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강수진 지부장은 “초기만 해도 사측의 감시와 미행이 있었다. 현재는 이런 부당노동행위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제약점이 많다. 병원 내에서 조합원 가입 독려 등 여러 소통 도구가 필요하지만, 선전전 외에는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병동 출입과 순회, 기타 부서를 오가는 것을 감시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형식 보건의료노조 조직2실장은 “현재 많은 노동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지만 19년 전처럼 노-노 갈등을 통해 노동자들이 감정적 골이 생기게 하는 등의 부당 노동 행위가 우려된다”고 전했다.
강 지부장은,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 대해 “결국 같이 나아가는 거다. 머지않아 함께 해주길 하는 바람이 있다. 노동자들을 안고 활동하기 때문에 제대로 잘 보여주면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아울러 강 지부장은 “노조는 병원과 발맞춰 가야하기 때문에 긴 안목으로 당초 생각했던 취지에 맞게 가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며 “건설적인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노동자들의 권력을 받아 사측과 대등한 입장에서 상생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도 “노조가 없는 병원일수록 전근대적이고 독재적이며, 노동조건은 열악하고 노동자들은 존중받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출근하면 휴대전화를 반납해야하고, 선정적인 장기자랑을 강요받거나 오너 찬양 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나 위원장은 “비록 정부가 노동 존중 사회를 만들겠단 공약을 했지만, 이는 정부만의 몫은 아니다. 사업장에 노조가 생기면 갑질은 바로 사라진다”며 “노조할 권리, 노조 결성이 좀 더 쉬워져야 한다”고 밝혔다.
비단 나 위원장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는 노동조합이라면 업종, 업태를 불문하고 질색하는 경향이 크다. ‘쉬운 해고’는 말해도 ‘쉬운 노조’는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아직도 우리사회에 팽배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천길병원의 새노조는 어려운 첫 발을 내딛었다.
초기의 대중적 관심과 여론, 호의적 언론보도와 같은 순풍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이 사그라들면 금력과 권력은 병원이란 수직적 조직의 하층부에 있는 조합원들을 각개격파하려들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기자는 오픈채팅방이란 익명의 공간에서 오가는 가천길병원 노동자들의 기대에 찬 대화에서, 온종일 병동에서 환자를 보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 새노조 소식을 확인코자 스마트폰을 켜는 그 손짓에서, 작지만 뜨거운 희망을 엿본다.
김양균 쿠키뉴스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의 현장보고] 가천대 길병원 ‘새노조’ 출범… 변화의 길 열리나
입력 2018-08-12 20:26